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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580
한자 李敏求
영어음역 Yi Mingu
이칭/별칭 자시(子時),동주(東洲),관해(觀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3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
대표관직 강도 검찰 부사
출생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사마시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증광 문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홍문관 수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부산 순찰사 보좌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9년 - 별지제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선위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순찰사에 임명, 영가대 명명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강도 검찰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해배
몰년 시기/일시 1670년 2월 19일연표보기 - 사망
거주|이주지 한양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
부임|활동지 부산 - 부산광역시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강화도 - 인천광역시 광화군
유배|이배지 아산 - 충청남도 아산시
유배|이배지 영변 - 평안북도 영변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영가대(永嘉臺)의 이름을 지은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 증조 할아버지는 종친부 신당부수(宗親府神堂副守)를 지낸 이정(李禎)이고,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 이희검(李希儉)이며, 아버지는 이조 판서 이수광(李睟光)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의금부 도사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이성구(李聖求)이고 아들은 『동주집(東州集)』을 엮은 이원규(李元揆)이다. 딸은 신익성(申翊聖)의 아들 신승(申昇)에게 출가하였다. 할아버지 이희검, 아버지 이수광, 아들 이민구가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벼슬을 하였으며, 이민구가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 이수광은 사헌부 대사헌, 큰형 이성구는 사간원 헌납, 이민구는 홍문관 수찬에 올라 세간에서 일문삼사(一門三司)·소가 삼부자(蘇家三父子)로 불린 당대의 명문가였다.

[활동 사항]

이민구(李敏求)[1589~1670]는 21세 때인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이듬해 홍문관 수찬(修撰) 벼슬을 받았다. 1615년(광해군 7) 순찰사 권반(權盼)의 보좌관으로 부산에 파견되어 제방을 보수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6월 19일 홍문관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이 예업(禮業)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글공부에 전념할 33명을 선발할 때 조익(趙翼), 이식(李植) 등과 함께 뽑혔다.

1623년(광해군 15) 선위사(宣慰使)로 부산에 내려가 일본 사신을 접대하고 돌아왔으며, 조강(朝講)에서 이이(李珥)의 문묘 종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문재(文才)가 뛰어난 관료 10명에 뽑혀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비변사로부터 장수의 자질이 있는 문신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격문을 지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상으로 경상 관찰사가 되었고,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같은 해 순찰사로 부산에 파견되어 첨절제사(僉節制使) 전삼달(全三達),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엄황(嚴滉) 등과 함께 붕괴된 제방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1614년(광해군 6)에 권반이 세운 누각에 ‘영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 제영잡조(題詠雜條)에 따르면 신유(申濡)는 영가대에 대해 “권반은 민정을 살펴 깊은 계책으로 누각을 만들었고, 이민구는 높이 올라 영가라 이름 걸었네[吉川巡按留深策 觀海登臨揭永嘉]”라고 읊었다. 또한 『부진 제영(釜鎭題詠)』에는 영가대에 대한 사연을 소상히 기록한 「영가대기(永嘉臺記)」가 실려 있다. 이민구의 『동주집(東州集)』에 「형조 판서 길천군 권공 신도비명(刑曹判書吉川君權公神道碑銘)」이 실려 있는 데서도 이민구권반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민구는 또한 송공사(宋公祠)에 사액(賜額)을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하고, 부산진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鄭撥)도 함께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민구의 청으로 ‘충렬(忠烈)’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1624년(인조 2) 이후 송공사는 충렬사로 불리게 되었다. 동래 부사 이후 사간원 대사간, 병조 참의, 승지,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同知經莚事)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 검찰 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사직의 신주(神主)와 왕자 및 빈궁을 피난처인 강화도로 모시고, 섬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적이 침입하자 도망치는 바람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자, 비빈 등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 죄로 난이 끝난 뒤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1649년(인조 27) 풀려났으나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1670년(현종 11) 2월 19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아버지 이수광을 따라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고 명나라의 문학도 공부하였다. 이민구의 문학 활동은 이단에 대한 포용과 신분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그리고 자유로운 감정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정통 주자학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두고 남용익(南龍翼)은 “이민구가 명나라 의고파(擬古派)의 시풍을 숭상하여 시의 조예는 이수광에 못 미치나 격조는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고, 신위(申緯)도 “이민구의 시문은 아비를 능가한다”고 하였다. 이민구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의 졸기(卒記)도 “그 사람됨이야 논할 것도 없지만 시문은 그의 무리에서 탁월하게 빼어났다”라고 평할 만큼 뛰어난 문장을 자랑하였다.

이민구는 아버지 이수광을 비롯하여 신흠(申欽), 김장생(金長生), 이호민(李好閔), 한회(韓懷), 한술(韓述) 등에게서 배웠다. 교유한 이는 신익성(申翊聖), 김상헌(金尙憲), 허목(許穆), 장만(張晩), 임숙영(任叔英), 이명한(李明漢)을 비롯하여 여항 문인(閭巷文人)[중인이나 서민 문학을 하는 사람] 유희경(劉希慶), 백대붕(白大鵬)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의 문인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민구의 제자는 대사성을 지낸 권환(權瑍)[1636~1716], 예송 논쟁(禮訟論爭) 당시 남인의 주요 대표 논객이었던 윤휴(尹鑴), 그리고 이옥(李沃), 이계(李烓) 등이다. 이민구의 시풍은 채제공(蔡濟恭)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학(博學)을 중시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서와 저술을 좋아하여 평생 쓴 책이 4,00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전란으로 거의 타 버리고 아들 이원규가 시문을 모아서 엮은 『동주집』,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책 가운데 귀감이 될 만한 간언(諫言)을 추려서 적은 『간언 귀감(諫言龜鑑)』, 중국 당나라 시인 163명의 대표적인 율시(律詩) 877수를 골라서 엮은 『당률 광선(唐律廣選)』 그리고 역사서에 대한 단평(短評)을 적은 『독사 수필(讀史隨筆)』 등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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