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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34
한자 權盼
영어음역 Gwon Ban
이칭/별칭 중명(仲溟),폐호(閉戶)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범일동 3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관직 형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군자감 참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성절사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동래 순검사에 임명, 영가대 건립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형조 판서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31년연표보기 - 권반 사망
부임|활동지 경상도 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
부임|활동지 동래부 -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와 동래 순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명(仲溟), 호는 폐호(閉戶).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화(權和)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부정(副正) 윤건(尹健)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송씨(宋氏) 슬하에서 자라 영의정 윤국형(尹國聲)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부인 파평 윤씨는 윤국형의 딸이다. 아들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권경(權儆), 예조 좌랑 권주(權倜)이고, 딸은 목사(牧使) 이여규(李如圭), 진사 목낙선(睦樂善)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권반(權盼)[1564~1631]은 1594년(선조 27)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이어 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지냈다. 이듬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벼슬이 호조 좌랑에 이르렀다. 1599년(선조 32) 성절사(聖節使)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직강(直講), 사간원 헌납, 예조 정랑, 시강원 문학, 상례(相禮), 홍문관 부교리, 성균관 직강, 안주 목사,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선대(先代)에 하사 받은 길천군(吉川君)을 물려받았다. 이듬해 순검사(巡檢使)로 동래에 파견되어 해안의 방위에 힘썼고 이후 제조(提調), 나주 목사(羅州牧使),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거쳐 함경도·경기도·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권반은 1614년(광해군 6) 순검사로 동래에 나갔을 때 누각인 영가대(永嘉臺)를 세웠다. 이민구(李敏求)가 쓴 「영가대기(永嘉臺記)」에 따르면 당시 부산은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태풍으로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잦았다. 이에 권반은 전삼달(全三達), 엄황(嚴愰) 등과 협력하여 전함 30여 척을 계류할 수 있는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파낸 토사가 작은 동산을 이루자 그 위에 망루를 겸한 8칸 누각을 지었다.

1624년(인조 2) 부산에 선위사(宣慰使)로 내려간 이민구는 붕괴된 제방을 보수하고, 권반이 세운 누각에 영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가(永嘉)’는 권반의 본향인 안동의 옛 이름이다. 1624년(인조 2) 조선 통신사부터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까지 일본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은 이곳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낸 뒤 배에 올랐다.

권반은 1626년(인조 4)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갔을 때 대동법을 시행하려다 여의치 않자 전역(田役)을 고루 배분하고, 이를 법으로 정해 책자로 만들었다. 12년이 지난 후 김육(金堉)은 이 책자를 보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법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1627년(인조 5) 등극사(登極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형조 판서 등 재상직을 맡았다. 이때도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업무를 처리하여 칭송을 들었다.

[학문과 저술]

권반은 서화에 능하여 오세창(吳世昌)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서화가로 등재되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팔법(八法)을 잘 써서 태학에서 올리는 상소나 묘비 글, 국가의 신주(神主)를 쓸 때는 대개 공의 글씨로 썼다. 또 옛날 명화(名畵)와 법서(法書)를 좋아하여 변변찮은 작품도 깨끗이 정리해 놓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김상헌(金尙憲)권반의 묘표(墓表)에 쓴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묘소]

이민구가 쓴 「형조 판서 길천군 권공 신도비명(刑曹判書吉川君權公神道碑銘)」에 따르면 권반의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 손자 권제(權躋)와 권봉(權奉)이 인천의 도장산(道章山)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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