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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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永道 |
영어음역 | Yi Yeongdo |
이칭/별칭 | 정운(丁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종찬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조 시인이자 수필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정운(丁芸). 할아버지는 이규현(李圭峴)이고, 아버지는 선산 군수 이종수(李鐘洙)이며, 어머니는 구봉래(具鳳來)이다. 오빠는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이다. 딸은 박진아이다.
[활동 사항]
이영도(李永道)[1916~1976]는 1916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 내호동 259번지[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24]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할아버지 아래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밀양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를 거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목화솜을 잣는 물레 소리와 타작마당의 도리깨꼭지에서 시조의 가락을 익히고, 몰래 숨어서 문학 책을 탐독하였다. 대구의 명문 부호 박기수와 혼인한 뒤에도 불빛을 가린 채 팔목이 시도록 책을 읽었다고 한다. 1937년 10월 10일 딸 박진아가 태어났고, 1945년 8월 10일 남편이 위궤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12월 이윤수(李潤守)가 이끄는 대구의 시조 동인지 『죽순』에 「제야(除夜)」, 「바위」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시조 창작에 나섰다. 이영도가 문학가가 된 것은 시조 시인인 오빠 이호우의 영향이 컸다. 1945년 대구여자보통학교[현 대구서부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로 옮겨 1953년 5월까지 근무하였다. 작곡가 윤이상(尹伊桑)과 시인 유치환(柳致環)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였다. 이 시기에 폐침윤에 걸려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하였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10월까지 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때 거주하던 집에 수연정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였다. 1954년 10월 폐침윤이 재발하여 휴양을 겸하여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옮겨 1956년 9월까지 근무하였다. 이때의 당호는 계명암이었다. 1956년 9월 부산여자대학 강사가 되어 1959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영도는 동래 온천장 부근으로 거처를 옮겨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다.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64년 5월부터 1967년 10월까지 부산어린이집 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시조 동아리인 꽃무리회를 이끌며 「꽃무리회가」를 지었고, ‘달무리회’를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시조를 가꾸었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부산에서의 인연이 이어져 박옥금, 이채란, 조규근 등이 문단에 진출하도록 도왔으며 박시교, 김현, 이우걸, 임종찬, 박영교, 권도중, 김영재[이상 남자], 김남환, 전연욱, 정표년[이상 여자] 등을 지도하여 문단에 데뷔시켰다. 이영도에게서 시조를 배운 제자들이 현대율동인회를 조직하여 동인지 『현대율』을 2호까지 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1970], 한국여류문인협회 부회장[1974],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1975]을 지냈으며 제1회 대통령 출제 민족 시[시조] 전국 백일장 대회 심사 위원장[1975]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학과[1974. 3~1976. 3] 강사도 하였다.
이영도는 1976년 3월 6일 12시 5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을 만나 정리해 놓은 유고 시조집의 서문을 부탁하였고, 유서에는 시신을 화장할 것, 자신이 죽으면 알려야 할 사람, 영결 예배를 집도할 목사, 읽어야 할 성경 구절 및 찬송가, 기도할 사람 등을 적어 놓았다. 장례는 3월 8일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장례 위원장은 이은상이 맡았고, 시인 구상(具常)이 조사를 하였다.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하였으나 차마 뿌리지 못 하여 이영도의 고향인 청도읍 어목산(魚目山)에 안장하였다.
[학문과 저술]
1945년 문단에 데뷔한 이후 첫 번째 시조집인 『청저집(靑苧集)』[문예사, 1954. 1. 7]을 비롯하여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 『석류』[중앙출판공사, 1968. 2. 15], 유고 시조집 『언약』[중앙출판공사, 1976. 10. 15]을 냈다. 수필집으로는 『춘근집(春芹集)』[청구출판사, 1958. 11. 25], 『비둘기 내리는 뜨락』[민조사, 1966. 10. 5],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중앙출판공사, 1971. 4. 25], 『애정은 기도처럼』이 있고 유고 수필집으로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중앙출판공사, 1976. 10. 5]이 있다.
[묘소]
이영도의 묘는 고향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의 선영인 어목산에 마련되었으며, 곁에는 오빠 이호우의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6년 눌원 문화상을 받았다. 1969년 5월 정운 시조 문학상[2003년 이영도 시조 문학상으로 변경]을 제정하여 지금도 시상하고 있다. 청도 이호우·이영도 생가는 등록 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고, 생가 인근에 오누이 공원이 조성되어 시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