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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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川院 |
영어의미역 | Sacheon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낙동강 변의 원 시설.
[제정 경위 및 목적]
사천원(沙川院)의 사천(沙川)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사천촌(沙川村)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하구, 서구, 중구, 영도구, 동구 등이 사천면이 되었다. 그 뒤 조선 후기 사천면은 상단(上端)·하단(下端)으로 구분되었고, 1780년(정조 4) 4월 사상(沙上)·사중(沙中)·사하(沙下) 3개 면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사중면이 사중면과 부산면으로 분리되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사천원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이 낙동강 수로(水路)를 통해 동래현이나 옛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사천원에 해당하는 교통 편의 시설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역원에 “사천원은 동평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沙川院 在東平縣今無]”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
사천원과 관련하여 동래부 사천면 고문서에 나오는 사상 연구계(沙上戀舊契) 좌목(座目)의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동래부 모라에 원(院)이 설치되어 100여 년 동안 동래부에 부임하고 퇴임하는 신구(新舊) 사또를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을 사상 연구계가 맡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상 연구계 신좌목[1810]을 보면 “사또가 도임할 때는 삼랑진에서 보면 모라리로 왔다가 읍으로 가고 구관 사또 역시 그렇게 하였으며, 맞이하고 송별할 때의 경비가 매우 많이 들었는데 계중(契中)에 전례대로 물자를 내어 거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 후 100년 만에 신구 사또를 맞이하는 일이 북면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신구 사또의 이임식이 거행되던 곳이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낙동강 변의 사천원이었다. 하지만 『동래부지』 역원에서 사천원이 당시에 사라진 상태라 하므로 18세기 초반까지만 원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사천원은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위치한 동원(東院)이 혁파되면서 관원 영송(迎送)이라는 역원지의 기능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 약 100년 동안 사천원이 존속한 것이다.
조선 시대 사상면 모라리에 있던 사천원의 나루터로 추정하는 동두저포(東頭渚浦)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현재에도 사천원과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사상 고문서 전답(田畓) 지명인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의 원동 들판[院洞野]이나 현재까지 전하는 원동원(院洞員)이라는 지명을 통해 모라동 일대에 옛날 원에 딸린 전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곡(院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이 있던 산골짜기를 원곡이라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곳에 일본 사신이 조운하던 배가 머물렀고 교역을 한 수참[시쯔메] 나루터의 지명이 전해 온다.
[의의와 평가]
사천원은 역사 소재가 부족한 부산광역시 사상구의 지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좋은 단서를 제공하는 낙동강 변의 원 시설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