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61 |
---|---|
한자 | 統一新羅時代-生業 |
영어의미역 | Occupation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일거리.
[개설]
동래군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업은 농업이었으며, 해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절영도에서 명마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말을 사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농업]
통일 신라 시대 일반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한 생업으로 가장 일반적인 일은 땅을 갈아먹고 사는 농업이다. 그 외 상업과 수공업, 어업 등 다양한 일거리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통일 신라 시대의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여 가족생활을 영위하는 자영농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 하대로 내려가면서 농민층의 빈곤화로 인한 부(富)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는 확대되었고, 일반 농민층 가운데 자신의 토지를 상실하고 품팔이를 통해 살아가는 용작농(傭作農)이 나타났다. 용작농들은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하였다.
당시의 농민들은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에서 확인되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을 경작하면서 삶을 영위하였다. 이 문서에 따르면 각 촌락마다 가장 낮은 호등인 하하연(下下烟)의 비율이 가장 높다. 하하연은 토지 소유 규모가 매우 적으며, 토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농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농민들은 귀족들의 전장(田莊)이나 남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삶을 영위해 갔다. 이처럼 동래군의 사람들은 연수유전답을 경작하는 자영농이나 용작농(傭作農)으로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수공업]
통일 신라에는 수공업을 통해 생활을 영위한 계층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중 수공업이나 관영 수공업에 종사하는 전업적 수공업자도 있었고, 일부는 생활 용품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생활을 영위한 민간 수공업자도 있었다. 이러한 민간 수공업자의 구체적인 활동상이 잘 나타나지는 않으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농민들의 주요한 농기구였던 호미나 낫을 비롯하여 수레의 부품, 일상생활에 필요한 칼, 마치, 바늘 등의 철제품, 기와 등의 제조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이곳 동래군에도 관영 수공업자나 민영 수공업의 형태로 수공업을 생업으로 생활하는 수공업자 층이 있었을 것이다.
[상업과 무역]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면 이전 시기보다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상업을 통해 삶을 살아간 다양한 상인층이 나타났다. 경주뿐 아니라 9주 5소경 등의 시전에서는 시전 상인이 있었을 것이며, 오통(五通)의 교통로를 이용한 유통망을 통해 유통을 담당한 상인과 다양한 행상 등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당(唐)과 일본과의 대외 무역을 담당한 무역상이나 해상의 존재도 확인된다.
특히 동래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교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발해가 등장하여 일본과 발해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통일 신라와의 관계는 경색 국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의 신라 교관물(交關物)에 대한 요구로 인하여 공무역보다는 사무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군소 해상 세력이 해안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등장하였다. 따라서 동래군 사람들도 무역과 관련된 일이나 배의 운항과 관련된 다양한 일에 종사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