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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의 지역 교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59
한자 統一新羅時代-地域交流
영어의미역 Regional Trade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한정훈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과 인근 지역 간의 교류 활동.

[오통과 지역 교류]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神文王) 대에 삽량주[지금의 양산] 소속의 거칠산군(居漆山郡)은 대증현(大甑縣)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을 영현(領縣)으로 두었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대에는 이러한 군현 지배 관계를 유지한 채 양주(良州)에서 동래군(東萊郡)으로, 동래군에서 기장현(機張縣)과 동평현(東平縣)으로 고을 명칭만 한자식으로 바꾸어 통일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변동이 없었다. 그런 만큼 이들 고을 간의 행정 업무 교류가 빈번하였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때 정치·행정 활동과 지역 상호 간의 교류뿐 아니라 경주와 지방 간의 경제적 왕래와 문화적 교류 활동에 이용되었던 육상 교통망을 오통(五通)이라 부른다. 동해통(東海通)·해남통·염지통·북요통·북해통으로 구성된 오통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다섯 방면으로 뻗어나가 전 영역을 아우르는 육상 교통망의 다른 이름이다. 경주에는 오통이 출발하는 역(驛)으로 다섯 개의 역(驛)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해통과 지역 교류]

일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경주에서 부산 지역으로 이르는 교통로는 오통 중 동해통일 가능성이 높다. 동해통을 통해서 도달하는 영역 안에는 동래군·동평현을 비롯하여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구(東海口), 동진현(東津縣), 동안현(東安縣) 등이 있다. 경주의 사천왕사 문 앞의 큰 길을 통해 남교(南郊)에 이른 다음, 오늘날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위치한 굴헐역(屈歇驛)[경주시 외동읍 구어리]과 굴불역(屈弗驛)[울산시 중구 다운동 일대 추정], 영취사[울주군 청량면]를 경유하여 오늘날의 부산~울산 간 국도 7호선을 따라 부산의 동래군에 이르게 된다.

동해통을 이용한 경주와 동래군 간의 왕래는 활발하였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태종대에 와서 활을 쏘았고, 신문왕 대의 재상 충원공(忠元公)을 비롯한 왕과 귀족들이 동래군의 온정(溫井)에 목욕을 왔을 것이다. 또한 의상 대사(義湘大師)를 비롯한 승려와 범어사로 순례 활동을 온 불자들, 해운대신선대에 자취를 남긴 최치원(崔致遠)의 유람 활동, 중사(中祀)인 형변 부곡(兄邊部曲)으로의 신앙 활동, 절영도 명마의 공납이나 선물, 동래군 수취물의 운반 활동 등 경주와 동래군 간의 다양한 교류 활동이 동해통의 육상 교통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세곡과 같이 대규모 운수 활동에는 동해 연안 항로나 낙동강 수운이 일부 활용되었을 것이다.

동래군을 비롯하여 인근의 양주·동평현·기장현·금관경 상호간의 교류 활동은 동해통과 같은 간선 이외의 지선 교통로를 이용하였다. 특히 동래군~기장현 간의 교통로에 위치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일대에서 6세기 후반~7세기 후반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 유구와 건물 터가 발굴되어 당시의 도로 규모, 노면 구조, 수레바퀴의 형태 등을 알 수 있다. 한편 국토의 동쪽에 치우진 경주에서 지리산이나 전라도 방면으로 가려고 할 때에는 동래군보다는 양주의 황산진(黃山津)에서 낙동강을 건너 금관경[김해]·강주[진주] 지역에 도달하였다. 이 교통로는 동해통과 구분되는 해남통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은 경주의 동해안에서 남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상 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만큼 통일 신라 시대 연근해 해상 교류를 할 때 중간 귀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후삼국 시기 견훤(甄萱)왕건(王建)이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쟁패 과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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