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25 |
---|---|
한자 | 朝鮮時代-漁撈技術 |
영어의미역 | Fishing Techniques of the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수희 |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어로 방법.
[개설]
부산 지역은 지세가 완만하고 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해안선이 길고 조류의 흐름이 빨라 그물을 고정시켜 잡는 정치망 어구가 발달하였다. 정치망 어구는 어류가 들어오는 완내 길목 회유로(洄有路)에 설치하였고 모래사장이 있는 곳에는 그물을 던져 끌어당기는 후릿그물 어업을 하였다. 또한 연안 곳곳 바다 속 암석에는 미역밭이 있어 많은 미역이 채취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해세조를 보면 경상도에서 진상한 수산물은 대구·청어·광어·전복·문어·해삼·홍합·은어·미역·가사리이다. 어류는 대구와 청어, 은어이고 그 밖에의 수산물은 전복·문어·해삼·홍합이며 해조류는 미역·가사리였다. 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는 정치망 어구로 청어나 대구를 많이 어획하였고 전복·홍합·해삼·미역 어업도 성행하였다.
[어로 방법]
조선 시대 부산에서는 어장(漁帳)이나 어전(漁箭), 후릿그물, 걸그물, 망선망과 같은 그물망과 간단한 낚시와 포획 도구로 해산물을 포획·채취했으며 구체적인 어로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그물 어업
어장은 어망을 일정한 수면 위에 부설하여 어군이 길그물[원망(垣網)]에 차단되어 까래그물[부망(敷網)] 위에 진입하는 것을 대기하여 어획하였다. 어전은 임통의 양 모서리에서 해안을 향하여 장등의 발과 동일한 발을 방사선으로 세워 날개로 삼아 어류가 빠지려고 하면 날개에 차단되어 이를 떠올려 잡는 어업이다. 이러한 어로 기술은 고기잡이 터인 어장에서 그물을 처 놓고 기다리는 수동적 형태였으나 이와 달리 먼 바다에 나가 잡는 양중거처조(洋中去處條)와 양중거휘리(洋中擧揮罹)도 있었다.
영조(英祖) 때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됨에 따라 만들어진 「균역해세(均役海稅)」의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청어·대구어기에 어선이 어장에 들어가지 않고 또 어조(漁條)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대양 중에 체재하면서 잡는 것을 양중거처조라고 한다”고 하였다. 양중거휘리도 「균역사목」에 “그 망구(網具)가 커서 격군이 많고 비록 바다 위에서 잡더라도 그 이익이 많다”고 하였다. 양중거처조는 어떤 어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양중거처조는 망선망으로 떼를 지어 회유하는 물고기를 포위해 그물을 죄어 잡는 두릿그물의 하나이다.
2. 낚시 어업
어선 또는 떼배를 타고 10리 이내의 수심 30~40길 되는 외양에 출어하여 어선을 조류에 따라 부유하게 하면서 낚시를 드리웠다. 어민들은 낚시 줄을 감은 ‘견지’라는 실패를 잡고 외줄낚시로 물고기를 잡았다. 주낙은 배 한척에 열 광주리의 모릿줄을 내리는데 한 광주리의 모릿줄 길이는 250m이고 6m 간격으로 아릿줄을 달았다. 너비 5척의 어선에 5명의 어부가 승선하여 땅 거미에 출어하여 일몰 후에 주낙을 쳤는데 하룻밤에 2~3회 조업하고 새벽에 돌아왔다.
3. 포획 어구
전복과 홍합은 끌과 삼각형 사둘 앙바시로 떼어냈다. 먼저 패류가 부착된 암초에 가서 끌로 뜯고 한 사람은 앙바시로 패류를 잡았다. 미역은 대나무에 못을 관통시켜 놓은 도구를 가지고 떼배를 타고 미역을 따서 감아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