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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니 기사부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968
한자 井谷儀三郞
영어음역 Itani Gisaburou
이칭/별칭 정곡의삼랑(井谷儀三郞)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미곡취인소 이사장
출생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오백정상점 부산지점 점원으로 조선에 건너옮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오백정상점(五百井商店) 부산지점 지배인[지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부산상업회의소 평의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부산부협의회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부산부회 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부산미곡취인소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조선곡물협회 이사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경상남도 도회 민선 의원에 당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3월 - 조선총독부으로부터 은배 수여
특기 사항 시기/일 1914년 8월 - 상훈국 총재로부터 금배 수여
출생지 일본 와카야마 현 나하군 암출정 자청수[和歌山縣 那賀郡 岩出町 字淸水]
거주|이주지 정곡상점, 정곡정미소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구 부산부 대창정 4정목 49]
활동지 정곡상점, 정곡정미소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구 부산부 대창정 4정목 49]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미곡상.

[가계]

이타니 기사부로[井谷義三郞]는 1876년 4월 28일 일본 와카야마 현 나하군 암출정 자청수[和歌山縣 那賀郡 岩出町 字淸水]에서 정곡평삼랑(井谷平三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내는 산리오랑(山里五郞)의 딸인 정곡미희자(井谷美喜子)이고, 자녀로는 부산고등여학교 출신 큰딸인 정곡미지자(井谷美智子), 둘째 딸인 정곡현자(井谷絢子)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타니 기사부로는 1893년(고종 30) 고향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오사카[大阪]로 나와 조선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오백정장평상점(五百井長平商店)[약칭 오백정상점]에 입사하였다. 오백정상점은 오사카에서 성업하던 오백정장병위상점(五百井長兵衛商店)이 사업에 실패하자, 상점 종업원이었던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와 오백정장병위(五百井長兵衛)의 아들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이 협력하여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1880년 오사카에 설립한 상점이었다.

이타니 기사부로가 오백정상점에 입사했을 당시 오백정상점 부산지점은 하자마 후사타로가 맡고 있었다. 1894년(고종 31) 오백정상점 부산지점원이 되어 조선으로 건너온 이타니 기사부로는, 1895년(고종 32) 지배인이었던 하자마 후사타로가 독립하자 그를 이어 부산지점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10년 이상 오백정상점 부산지점을 이끌었다.

그동안 이타니 기사부로는 개인적인 성장도 이루어 1907년 부산번영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08년 오백정상점에서 독립하여 미곡 무역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상점과 정곡정미소(井谷精米所)를 열었다. 1914년 부산곡물시장의 설립에 관여하여 평의원이 되었고, 이후 줄곧 조선미, 또는 곡물 관련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일본 본국의 조선미 수입에 대한 중대한 걸림돌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선미 옹호 운동’에도 적극 나서 도쿄[東京]까지 가서 운동을 전개하는 등 조선미 옹호에 열렬히 활동하였다. 경남승입주식회사(慶南繩叺株式會社)

경제 부문과 관련한 중요한 직책을 살펴보면 부산곡물상조합장, 부산정미업조합장, 부산미곡취인소 이사장, 선미협회(鮮米協會) 간사, 부산미곡증권신탁주식회사 취체역, 부산공동창고주식회사 취체역, 경남승입주식회사(慶南繩叺株式會社) 사장, 소화토지건물주식회사 취체역, 부산수산주식회사 감사역 및 취체역, 경남은행 취체역, 부산잔교주식회사 취체역, 조선곡물협회 이사,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 감사역, 경남양곡 취체역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공직과 관련해서는 1909~1912년, 1916~1917년, 1920~1923년 줄곧 부산상업회의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20년~1923년까지는 부회두로 활동했으며, 1930~1933년까지는 특별 의원으로 일본인 경제의 활성화에 노력하였다. 1929년 부산부협의회 회원에 당선되어 당시 부산 지역의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전기 부영화 문제에 대해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의 이익을 옹호하는 ‘전벌파(電閥派)’, 또는 ‘부산협화회(釜山協和會)’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1934년까지 부산부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경상남도 의회 민선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14년 3월 지방 공공사업에 진력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은배(銀杯)를 받았으며, 같은 해 8월 상훈국(賞勳局) 총재(總裁)로부터 금배(金杯)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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