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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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湘 |
영어음역 | Uisang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부산 범어사를 건립한 신라의 승려이자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활동 사항]
의상(義湘)[625~702]은 625년(진평왕 47)에 경상북도 경주에서 한신(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상은 중국으로 가서 새로운 불교 사상을 접하고자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에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지엄은 전날 밤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까지 이르렀고,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華嚴經)』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며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에서 44세까지 중요한 시기에 해당되었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第二祖)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그가 의상에게 기울인 정성은 지극하였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 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상이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또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 도선 율사(道宣律師)와도 교유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그해에 강원도 낙산사(洛山寺)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 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의상의 관음 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었다.
그 뒤 676년(문무왕 16)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다. 이는 화엄 십찰을 건립하여 화엄 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산의 범어사가 그 중의 하나인데, 동해 변의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금정산에 가서 칠일 밤낮을 독경하니 왜구가 격퇴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 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부산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 십찰(華嚴十刹)이었다. 이 가운데 부산 지역의 사찰인 범어사에 대해서는 1746년 승려 동계가 만든 『범어사 창건 사적』에 범어사의 창건 설화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범어사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 곧 신라 흥덕왕 때에 창건되었다. 일찍이 해동의 왜인이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동해안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여 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소서. 태백산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의 제7후신입니다. 항상 성중 1천, 범중 1천, 귀중 1천, 이렇게 모두 3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합니다. 이에 화엄신중과 40법체,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따라다닙니다. 또 동해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는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어 항상 금색으로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고 마르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범천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 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밤낮으로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색신으로 화현할 것이며 또 비로자나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할 것입니다. 보현, 문수, 향화동자 등 40법체와 제신과 천왕을 거느리고 동해를 위압하게 되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만약 후대에 훌륭한 법사가 출현하여 계속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침입하게 되어 사방에서 병란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금정암 밑에서 화엄 정진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곧 사라졌다.
왕이 놀라 깨어나 새벽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 길한 조짐의 꿈 이야기를 하고서는 즉시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오게 했다. 왕은 의상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 밤낮을 일심으로 독경하였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제불, 천왕, 신중 그리고 문수 동자 등이 각각 현신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임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며 혹은 칼을 비처럼 뿌리며 혹은 모래와 돌을 비처럼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을 일으키니 병화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흔들었다. 이에 왜선이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으니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을 봉해서 예공 대사로 삼으니 이것이 곧 꿈의 영험이었다. 이런 연유로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이 밖에도 불영사(佛影寺)·삼막사(三幕寺)·초암사(草庵寺)·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이 모든 사찰들이 모두 의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나, 의상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은 틀림이 없다. 또 의상의 교화 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었다. 의상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나와 있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法界圖)』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여 물어올 때에는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의심나는 점을 풀어서 계발(啓發)해 주었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었다. 『법계도』를 배울 때 “부동한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의 뜻이다[不動吾身卽是法身自體之義]”라는 데 대한 해석을 듣고 표훈과 진정이 각각 『오관석(五觀釋)』·『삼문석(三門釋)』을 지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의상의 제자들이 매우 창의적으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이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신라 문무왕은 이에 감사하여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법(佛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 가지로 합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내가 장전과 노복을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法界)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며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까지 전해져 『송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송고승전』에는 의상의 인품에 대하여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하게 여겨 강의를 하는 일 외에는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다. 또 언제나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더러움을 씻는 법]을 좇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또 의복과 병(甁)과 발우의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문무왕이 어느 날에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 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역사(役事)를 중지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술로는 『화엄십문간법관(華嚴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 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이는 당시 많은 고승들의 저술과 비교할 때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나, 『화엄일승법계도』만으로도 깊이 있는 사상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 저술들은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贊寧)이 지적한 대로 『화엄경』에 나타나는 법성(法性)의 바다를 천명한 것이며, 비로자나불의 한없이 깊은 의미를 밝히는 데 그 뜻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신라 하대에 화엄종에서 지엄에서 의상으로 이어지는 역대 화엄 조사의 추복(追福)을 위해 화엄종 승려들이 주도하여 화엄결사(華嚴結社)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