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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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在喆永世不忘碑-鳴旨洞- |
영어의미역 | Memorial Tablet of Hong Jaecheol in Myeongji-dong |
이칭/별칭 | 순상국 홍공재철 영세불망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영강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조선 후기 경상 감사 홍재철(洪在喆)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영조 을축년[1754] 공설 염전을 설치할 때 염전이 많이 줄고 땔감 사정은 더 나빴다. 홍재철[1799~?]은 경상 감사로 부임한 이듬해 신축년[1841] 가을에 공염(公鹽)으로 바쳐야 할 소금 1,000섬에 섬당 1량씩 땔감 값을 보태어 1,000량을 먼저 책정하여 주었고, 춘등염(春等鹽) 2,000섬의 땔감도 이런 식으로 정해 매년 3,000량씩을 염민(鹽民)들에게 지원해 주어 명지 백성들에게 큰 은택을 베풀었다고 한다.
[건립 경위]
홍재철 영세불망비(洪在喆永世不忘碑)[명지동]는 경상 감사 홍재철이 명지의 소금 굽는 백성에게 베푼 선정을 기려 1841년(헌종 7)에 세웠다.
[위치]
홍재철 영세불망비[명지동]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영강 마을 명지 치안센터 앞에 있다.
[형태]
갓머리 형태의 검은 돌에 새겨져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순상국 홍공재철 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삼천 냥의 자금을 출연하시어/ 염민들의 어려움을 구해 주셨네. 천년 백년 후에까지/ 한 조각 비석은 전해 주리라[捐金三千 歲捄鹽民 於千百歲 片石堪言]”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영조 을축년에 처음 공염을 설치하였을 때 72개의 솥을 건 염전을 두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37개의 솥만 남았고, 게다가 지금 땔감을 귀하기가 금과 같다. 연례로 공염 3,000석을 바치는데, 한 석의 원가가 한 냥 5전이니 합 4,500냥이고, 그 외 임자년에 정한 한 석의 땔감 값이 5전으로, 합이 1,500냥이지만 거의 만에 하나 정도 채울 뿐이라고 한다. 우리 관찰사께서 남쪽으로 오신 이듬해 신축년 가을에 걷어야 할 소금 1,000석을 한 석당 열 냥으로 땔감 값을 보태어 채워 주되 1,000냥을 먼저 내려 주시며, 춘등염 2,000석에 땔감 값 2,000냥을 응당 시행할 전례로 만드셨다. 그래서 매년 3,000냥으로 바로잡아 주셨으니, 이전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은혜요, 뒤로 몇 백 년 동안 썩지 않을 은택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돌에 새겨 둔다. 숭정 기원 후 주상 8년 신축년 10월에 세우다[粤在 英廟乙丑年 公鹽設始之初 七十二釜之鹽田 漸縮爲三十七釜 而況今柴政 其貴如金 年例納公鹽三千石 每石元本價 一兩五戔 合四千五百兩 外壬子年所創每石柴價五錢 合一千五百兩 庶幾乎萬一之補云爾 又我巡相國 按南之越明年辛丑秋 當捧鹽一千石 每石十兩式 添補柴價 而一千兩 登先劃下 春等鹽二千石 柴價二千兩 已是應行之例也 然則每年三千兩矯捄 前數百年所未有之惠 後幾百年所不朽之澤 是以被之不朽者石 崇禎紀元後上之八年辛丑十月 日 立 都監 幼學 金鴻運 謹序 幼學 崔正麟 謹書 有司 幼學 金應烋].”
[현황]
노천에 방치되어 있어 잘 보호되고 있지 않다. 명지 염전을 알리는 자료인 만큼 관리가 필요하다. 부산광역시 강서구가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