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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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戰亡遺骸之塚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the War Dead during the Year of Im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7-67[온천동 산17-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영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성 군·관·민의 유해를 거둔 무덤 앞에 세운 비.
[건립 경위]
1731년(영조 7)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허물어진 동래 읍성을 수축하기 위해 옛 남문 터를 파니 임진왜란 때 순절한 수많은 유골과 포환, 화살촉이 나왔다. 유해를 깨끗한 종이와 베에 싸서 삼성대(三姓臺)에 정성 들여 묻고 임진 전망유해지총비(壬辰戰亡遺骸之塚碑)라 하여 비석을 새겨 유래를 밝혔다.
[위치]
임진 전망유해지총비는 임진 동래 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 전망유해지총]이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으로 옮겨질 때 함께 옮겨졌다가, 1974년 다시 온천동 17-7번지 금강 공원으로 옮겨져 임진 동래 의총 경내에 안치되어 있다.
[형태]
민머리 양식으로, 비석의 윗면은 둥글게 마감하였다. 앞면에는 제액을 새겼고, 뒷면에는 10줄로 내력이 씌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03㎝, 너비 45㎝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임진 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아! 이 여섯 개의 무덤은 바로 임진년에 돌아가신 유해의 장지(葬地)이다. 지금부터 임진년까지는 140여 년이나 되었는데 화살촉이 녹아 없어지지 않고 부러진 창이 삭지 않은 채, 왜적이 쏜 돌과 탄환이 유해 사이에 많이 남아 있으니 정말로 슬픈 일이다. 대개 이 남쪽 성 근처는 바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선생이 순절한 곳이다.
신해년[1731, 영조 7]에 마침 조정의 명령으로 처음으로 동래 읍성을 쌓으면서 옛 성터를 넓혔는데, 이들의 유해가 옛 성 남문의 좌우에서 모두 나왔다. 이들은 모두 임진년의 난리에 성을 지키며 목숨을 던져 겹겹이 포위된 속에서도 천곡 선생을 따라 같은 날에 절개를 지켜 돌아가신 사람들인데 유독 그 이름을 상고할 수 없어 충렬사 제향의 반열에 참여시키지 못하니 매우 애석하도다.
전후로 발견된 유해는 모두 12구이지만, 이것은 특별히 그 형체와 뼈가 온전한 것이고 그 잔해가 조각조각 떨어져 부서진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 거두어 상자에 넣어 동래부의 남쪽 삼성대의 서쪽 산기슭에 옮겨 묻어 주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바라건대 충신 의사의 장지인 것을 알고 밟지도 말고 훼손하지도 말아라. 또한 바라건대 해마다 농주산(弄珠山) 4월의 제사 때에는 이 무덤에 따로 제사를 지내서 마을의 고사(故事)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표창하는 방법 같은 것은 훗날 쇠퇴한 세상을 진작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 동래 부사 동래 정언섭 서, 감관 정원교, 지금 주상 7년 신해년[1731] 7월에 세움[嗚呼 此六塚卽壬辰戰亡遺骸之葬也 今去壬辰百四十餘年 而矢鏃不鑠 折戟未銷 賊砲石丸多在骸間 見之 絶可悲惋也 盖此南城之畔 卽泉谷宋先生殉節之墟也 歲辛亥適以朝命 始築邑城 開拓故址 此骸之出 皆在於舊城南門之左右 是皆壬亂守堞投命重圍 並從泉谷 而同日立慬者 獨其姓名無以考據 不得與於忠烈俎豆之列 重可惜也 前後所發 凡十二骸 然此特其形骨宛然者爾 其殘骸之片片零落者 又不可勝計 斂匣移瘞於府南三星臺之西麓 凡我州人尙識其爲忠義之葬 而勿踐勿夷 亦願每年弄珠山四月之祭 別祭於此塚 以行邑中故事可也 若夫表章之方 以俟後之任衰世之責者云爾 東萊府使 東萊 鄭彦燮 書 監官 鄭元僑 上之七年辛亥 七月 立].”
[현황]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 전망유해지총비는 임진왜란 시기 동래성 전투 당시 전몰자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