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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적 축제혜민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052
한자 李明迪築堤惠民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Yi Myeongjeok
이칭/별칭 부사 이공명적 축제혜민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상로 320-1[덕포동 417-1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명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혜민비
관련인물 이명적(李明迪)[1795~?]|황해상(黃海祥)
크기 184㎝[높이]|47㎝[너비]|16㎝[두께]
건립 시기/일시 1841년 10월연표보기 -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이명적 출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39년 1월연표보기 - 이명적 동래 부사 부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40년 6월연표보기 - 이명적 동래 부사 퇴임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417-15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 부사 이명적(李明迪)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이명적[1795~?]은 1839년(헌종 5) 1월부터 1840년(헌종 6) 6월까지 동래 부사로 재직하였다. 1841년(헌종 7) 10월 이명적이 퇴임한 뒤 별감관 황해상(黃海祥) 등 동래부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이명적 축제혜민비(李明迪築堤惠民碑)를 세웠다.

[위치]

이명적 축제혜민비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417-15번지에 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상강선대(上降仙臺) 어귀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 끝에 도로와 인접하여 있다.

[형태]

비문의 전면에는 붉은 칠이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84㎝, 너비 47㎝, 두께 16㎝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부사 이공명적 축제 혜민비(府使李公明迪築堤惠民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사면(沙面) 한쪽은 강과 바다가 교차되는 곳에 접해 있어 해마다 침수를 겪었다. 무신년 새 둑을 쌓은 뒤로 주민들이 안전한 제방이 있음을 즐거워하였는데 그 후에 다시 둑이 무너졌다. 이것을 수축한 일과 임진년에 중수한 사실은 앞에 적은 비문에 상세하므로 지금 군말을 보태지는 않겠다. 그러나 뜻밖에도 기해년 물난리로 십 리나 되는 긴 둑이 □□ 무너지고 마른 밭, 진 논 할 것 없이 모조리 물고기와 □의 거처가 되어 버렸다. 애석하게도 이 사면만이 홀로 참담하고 황급한 지경을 당해 장차 모두 죽을 뻔하던 차, 우리 부사께서 품고 보호하여 그 어려움을 구제해 주셨다.

이듬해 봄 감영에 요청하여 이웃 읍의 장정 2,600명과 본 읍의 장정 5,000명을 뽑아 같은 해 3월 초하루에 공사를 시작하여 26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리고 강자도(綱子島)의 둑이 또 침몰해서 새로 쌓았더니 우뚝이 솟아 바닷물을 밀어내고 그 피해는 사라졌다. 우리 부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이루었겠는가? 은혜롭게 머물렀다 가신 후로, 떠나신 뒤의 그리움을 생각하여 드디어 돌에다 새겨 영원토록 잊지 않고자 하노라.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축년[1841] 10월 남평 문진열 삼가 적다. 별감관 황해상, 도감 수성 별장 신응백, 읍리 호장 이사훈·박옥근, 면패장 최건원·최대륜·김환정·황치문·이장원·김규혁·이성엽·박치연·황해주·이정관, 수비 도감 유학 조광규·서형후[惟沙一面 濱于江海交衝之地 歲被沈墊 戊申新堤之後 民有安堤之樂 而其後堤顚 築與壬辰重修之蹟 詳悉於前述碑文 今不架贅 而匪意 己亥之水 十里長堤 □潰□□ 旱田水田 盡爲魚□之居 哀此一面 獨被慘歉遑急景色 若將盡劉 我侯懷保 賑濟其窮 翌年之春 請于巡營 劃隣邑丁二千六百 本邑丁五千 同年三月初一日 肇役 卄六日 功告訖 而綱子島堤 又沒 新築 屹然捍海 其害乃去 微吾侯 何以致此 惠存來後 議純去思 遂劂于石 以永其不忘云爾 崇禎 紀元後 四辛丑 十月日 南平文進烈謹識 別監官 黃海祥 都監 守城別將 辛應白 邑吏 戶長 李思勳 朴玉根 面牌將 崔建遠 崔大崙 金煥鼎 黃致問 李長元 金奎赫 李聖曄 朴致連 黃海珠 李禎寬 竪碑都監 幼學 趙光珪 徐炯垕].”

[현황]

부사 이경일 축제혜민비(李敬一築堤惠民碑)와 부사 박제상 축제혜민비, 효자 주구성 정려비(具周星旌閭碑)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명적 축제혜민비낙동강의 범람이라는 자연재해에 대처하여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꾸준히 제방을 축조하였던 증거로서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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