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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덕 정려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000
한자 魚敬德旌閭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Fonoring the Virtue of Eo Gyeongdeok
이칭/별칭 효자 어경덕지려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534 압곡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정려비
관련인물 어경덕(魚敬德)
재질
크기 30㎝[높이]|76㎝[길이]
건립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19년 - 이전
이전 시기/일시 2008년 - 이전
보수|복원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 보수
보수|복원시기/일시 1971년 9월연표보기 - 보수
관련인물 생년시기/일시 1629년연표보기 - 어경덕 출생
관련인물 몰년시기/일시 1701년연표보기 - 어경덕 사망
관련사항 시기/일시 1665년 - 어경덕 정려됨
현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원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534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던 조선 후기 부산 출신 효자 어경덕(魚敬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어경덕[1629~1701]은 녹산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어공명이 대마도에 갔다가 배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바다를 보고 3년 동안 통곡하며 지내다 밀려 온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모신 뒤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배를 타지 않았고 바다를 말하지 않았으며 해물을 먹지 않았다. 어경덕은 이 같은 효행으로 1700년(숙종 26) 복호(復戶)[조선 시대 국가가 호에 부과하는 요역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던 제도]가 되었다. 1919년 어경덕의 효행을 알리기 위하여 정려각을 세웠다.

[위치]

어경덕 정려비(魚敬德旌閭碑)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534번지 압곡 마을에 있다. 세산 농협에서 녹산동 주민센터 방향 2㎞ 삼거리에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쪽으로 압곡교를 지나 압곡 마을 어귀 가기 전 100m쯤에서 왼쪽 산길로 접어들어 약 100m 지점의 배수로 옆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111㎝의 지주 위에 높이 44㎝, 너비 128㎝ 가첨석이 얹혀 있다. 그 안에 높이 75㎝, 너비 32㎝가량의 석판 위에 높이 30㎝, 길이 76㎝의 T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효자 어경덕지려(孝子魚敬德之閭)’이며,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종 을사년[1665]에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고, 그 뒤 다섯 번째 기미년[1919]에 다시 고쳐 이건하였다[顯宗乙巳命旌 后五己未 復繕移建]”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함종(咸從) 어경덕 공은 송정(松亭) 선생 영준(泳濬)의 현손(玄孫)이다. 부친 참봉공이 현종 계묘년[1663]에 명령을 받고 사신을 따라 대마도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가라앉고 말았다. 공이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3년 만에 시신이 저절로 떠올라 왔다.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가 내렸다.

공은 시신이 떠오른 뒤에 비로소 삼년상을 지냈고, 종신토록 배를 타지 않았으며 바다를 말하지 않았고 생선도 먹지 않았다. 정려를 내린 후 255년 되는 기미년[1919]에 석제 정려비로 옮겨 세워 오랜 세월 동안 가도록 계획하여 방손(旁孫) 재원(在源)과 재영(在泳)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족손 통정대부 학부 편집국장 공훈4등 윤적이 삼가 기록함. 후생 유학 김해 김규석 삼가 씀[咸從魚公敬德 松亭先生泳濬玄孫也 考參奉 恭命於顯宗癸卯 從使對馬島 船敗而沒 公日望海而哭 三年屍自浮海而至 事聞旌閭 公自屍至後 始行三年喪 終身不乘船 不言海 不食魚 綽楔後二百五十五年己未 移建石閭 爲久遠圖 旁孫在源·在泳 主其事云 族孫 通政大夫學部編輯局長 勳四等 允迪 謹識 君後生 幼學 金海 金圭奭 謹書]”

[현황]

어경덕 정려비가 있던 지역에 2008~2011년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미음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비를 후손인 어경선의 사유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으로 옮겼다.

[의의와 평가]

어경덕 정려비는 정려가 내린 뒤 250여 년 뒤에 다시 고쳐 세웠는데, 이는 후손들이 선조의 효행을 잊지 않고자 한 뜻으로 지금의 젊은이들이 잊혀 가는 선조들의 역사를 다시 깨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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