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899
한자 慶州崔氏貞烈閣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Cherishing the Sacrifice of Gyeongju Cho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렬각|비|정려비
양식 팔작지붕
소유자 김해 김씨 문중
건립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19년 12월연표보기 - 중건
현 소재지 경주 최씨 정렬각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
원소재지 경주 최씨 정렬각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개항기 김윤세(金允世) 처 경주 최씨의 정렬각.

[개설]

증자선대부 내장원경(贈資善大夫內藏院卿) 김윤세가 고령(高靈)에서 객사하자, 부인 경주 최씨는 부음을 받은 그날 시부모를 위로하고 시동생 김윤규와 김윤한에게 노부모와 자식의 봉양을 부탁한 후, 고인 김윤세의 안치실에 들어가 누워 숨을 참아 자결하였다. 그날은 곧 남편이 죽은 뒤 5일이 되는 4월 10일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이를 장하게 여겨 경주 최씨의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위치]

경주 최씨 정렬각(慶州崔氏貞烈閣)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번지에 위치한다. 강서구 명지동 진목 마을의 음식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경상도와 진목 마을에서 경주 최씨의 효행과 열행의 사실을 연명으로 글을 올리니, 감영(監營)과 관청에서 포상을 잇달아 내렸다. 1891년(고종 28) 12월 27일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그 집안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경주 최씨의 자손들이 전 경상 도사 옥산 장복추를 찾아가서 비문을 만들고, 1892년(고종 29)에 경주 최씨 정렬각을 세웠다. 이후 정려비가 오래되어 훼손되자 아들들이 옛터에 기와 대신 석재로 중건하였다. 그리고 녹산의 경주 이씨(慶州李氏) 계림 이명수에게 부탁하여 글을 짓고, 조카 김문두가 글을 새겨서 비각을 만들었다. 다만 정려비와 함께 있던 경주 최씨의 무덤은 1970년대 경지 정리 과정에서 사라졌다.

[형태]

화강암 비신으로 ‘T’ 자의 비 모양이다. 같은 석재로 만든 팔작지붕 아래 비 양옆에 긴 2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위쪽 비신의 가로는 65㎝, 폭은 12㎝, 높이는 28㎝이고, 아래 비신의 가로는 41㎝, 폭은 12㎝, 높이는 80㎝이다. 비석에는 ‘증자헌대부 내장원 경 김해 김윤세 처 열부 봉 정렬부인 경주 최씨지려[贈資憲大夫內藏院卿金海金允世妻烈婦封貞烈夫人慶州崔氏之閭]’, ‘국지이십팔년(□之二十八年)[주상 재위 28년]’이라고 써 있다. 그 다음에 ‘열부 최씨 정려명(烈婦崔氏旌閭銘)’이라고 써 있는데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옛 조□□와 이절부(李節婦)의 늠름한 의열(義烈)이 삼강(三綱)을 부식(扶植)한 것이 백세에 드문 일이지만,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칼로 목을 찔렀으니, 그것이 몸을 훼손시키는 것인지는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게 몸을 훼손시키는 것보다는 김해 땅 선비 김윤세의 처 최씨가 한 것과 같이 온전한 몸으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최씨는 경주 사람으로 삼백(三伯)의 따님이다. 친정에 있을 때도 오로지 효성을 다하더니, 시집을 가서도 부모를 받들고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최씨의 남편도 효성을 다하고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여 큰 복을 아직 누리지 못하였는데, 불행히도 정묘년에 고령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부음을 받은 그날 최씨는 […]한 말로 시부모를 위로하고 시동생 김윤규와 김윤한에게 노부모와 자식의 봉양을 부탁하고 드디어 […]에 들어가 숨을 참음으로써 남편을 따라 죽었다. 그날은 곧 남편이 죽은 뒤 5일이 되는 4월 10일이었다. 진목리(眞木里) 언덕 간좌(艮坐)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 사람이 싫어하는 것 가운데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죽음을 마치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기란 어렵다. 또 죽을 때 물려주신 몸을 훼손시킬까 염려되어 숨을 참아 온전한 몸으로 죽는 것은 더욱 어렵다. 옛날과 비교해 보더라도 효(孝)와 열(烈)을 같이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떳떳한 도리는 같은 것인지라, 고을과 도에서 연명으로 글을 올리고, 감영과 관청에서 포상을 내리더니, 신묘년 12월 27일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그 집안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명령하여 세상의 귀감으로 삼으니, 또한 어떠한가? 효자 동우와 동진, 손자 병두와 형두가 정려각을 세우고자 수백 리 길을 멀다 않고 재삼 나에게 정려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하늘이 정숙한 자질을 내리시어 시집가 그 남편과 짝하였네. 어찌 영원한 복록을 내리지 않고 이런 상서롭지 못한 일을 당하게 하는가. 오직 남편을 따라 죽으니 의리와 함께 묻혔네. 정려각 세워 새겨 두니 그 광채 영원하리. 임진년[1892] 청화절 통훈대부 전 경상 도사 옥산 장복추[烏乎 古曺□女·李節婦之凜凜義烈 三綱所扶 百世所難 然其死也 刀□經頸 猶不暇顧恤其毁體 則與其毁體 寧全歸如今金州士人金允世妻崔氏之爲哉 崔氏 慶州人 三伯之女也 在家維孝 及于歸 承順備至 夫以執孝 子姓滿前 未擬慶福 不幸丁卯所天 客隕于高靈 □承訃之日 崔氏□辭 慰舅姑 托夫弟允奎·允漢 以奉老撫孤 遂入□靈□□ 忍息而下從之 卽夫亡後五日 四月初十也 合窆眞木里負艮原 噫 人之所惡 有甚於死 而視死如歸 爲難死而恐毁遺體 忍息全歸 尤爲難 以古視今 孝烈兼全 豈非難之難也哉 秉彛所同 鄕道聯章 營官褒崇 粵辛卯十二月二十七日 自上命旌其閭·復其家爲世飾 顧何如也 孝子東禹·東鎭 孫秉斗·邢斗 將營棹楔 不遠數百里 再三請爲閭銘 銘曰 天與之淑貞 歸又配其良 胡不終天之祿 而罹此不祥 惟其殉 之 義與同藏 銘于棹楔 以永其光 壬辰淸和節 通訓大夫 前行慶尙都事 玉山 張福樞]”

그 다음에 ‘자 순창원 참봉 병두 공릉 참봉 형두 종자 효두 성두 손 용기 용배 용석 용묵 감동 종질 현두 전 감역 진사 장재민(子 順昌院參奉 秉斗 恭陵參奉 邢斗 從子 涍斗 聖斗 孫 容基 容培 容錫 容黙 監董從侄 鉉斗 前監役進士張載愍)’이라고 써 있다. 그 다음에 석정려 중건비[重建石閭記]라 써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늠름하다! 부인의 정렬(貞烈)이 진실로 […]에 합치되니, 거룩하신 교지로 먼저 정려를 명령하시고, 정렬의 호칭을 내렸는데, 정려를 세운 지 겨우 28년 만에 지역이 비루하여 바다의 장기(瘴氣)가 기와장을 […] 하였다. 아들 병두와 형두가 정려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기와 대신 석재로 세울 것을 계획하여 옛터에 중건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중건기(重建記)를 부탁해 왔다. 최씨의 절행(節行)은 이미 장사미헌(張四未軒) 선생의 기문(記文)에 상세하니, 감히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수는 없고 간략히 […]를 서술하였다. 기미년[1919] 12월 상완일 계림 이명수가 짓고, 종자 문두가 삼가 쓰다[凜凜乎夫人之貞烈也 允合于□聖旨 先降命旌 □贈貞烈而建閭 才二十有八年 地卑下 海瘴□瓦桷 □□□□矣 子秉斗·邢斗 爲久建閭 圖以石代瓦桷而重建于舊址 求余爲重建記而□□ 節行已悉於張四未先生記文 不敢更贅一辭 而略敍其□□ 己未十二月上浣 鷄林 李明洙 撰 從子 文斗 謹書]”

[현황]

현재 경주 최씨 정렬각 주위는 상록수로 단장되어 있으며, 효자 김홍수 효사비(金洪秀孝思碑)가 정렬각과 나란히 서 있다.

[의의와 평가]

경주 최씨 정렬각은 효자 김홍수 효사비와 함께 있어 효자와 열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효자와 열녀의 의미를 새기게 해 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