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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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百容 |
영어음역 | No Baekyong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3가 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좌익 운동가.
[가계]
노백용(盧百容)은 1885년 10월 16일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서 태어났다. 아들 노재갑(盧在甲)은 해방 후 김해군 인민위원장을 지냈고, 딸 노남교(盧南橋)는 부녀동맹 경남도지부 간부를 지냈다.
[활동 사항]
노백용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밀양공립보통학교[1908~1911], 김해공립보통학교[1912~1919] 등에서 훈도로 근무하였다. 김해경찰서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 당시에도 김해사립합성학교 교원이었다. 노백용은 3·1 운동 이후부터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청년 운동과 독립 운동을 펼쳤다. 1922년 김해청년회 간부를 역임했고, 1923년에 결성된 사상 단체 ‘제4회’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경상남북도 책임자로 활약하는 한편, 사상 단체 ‘정우회(正友會)’에 가담하였다.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로 활동한 언론인이기도 했던 그는 1928년 2월 4일과 5일 부산에서 개최된 제4회 경남기자대회에서 대회 집행부 의장과 의안 작성 위원을 맡았는데, 당시 소속이 ‘부산기자동맹’인 것으로 미루어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윤일(尹一)[윤택근(尹澤根)], 강대홍(姜大洪), 홍보용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약 2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면소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1930년 11월에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을 지냈으며, 1930년 12월 통의부 사건에 관련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해방 후에도 노백용의 좌익 운동은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 위원장과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경상남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7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산시위원회 위원장[일부 자료에서는 경상남도 지부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전향하여, 1949년 11월 국민보도연맹 경남도연맹의 간사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6·25 전쟁 발발 후 8월 22일 방첩대에 체포되어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언론 활동 이력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1945년 10월 8일 『인민 해방보』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부산 인민보』와 함께 미군정기 부산에서 발행된 대표적인 좌익계 신문이었다. 당시 『인민 해방보』 편집국은 중앙동의 박문당서점 옛터에 두었고, 인쇄는 충무동의 인쇄 공장에서 하였다. 이후 제호를 『부산 인민 해방보』로 바꾸고 1946년 8월 사옥을 대창동으로 옮겼다.
부산 출신의 소설가 김정한은 노백용을 모델로 한 소설을 몇 편 썼는데, 단편 「옥중회갑」[1946년]에서 노백용은 ‘K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등장한다. 또 단편 「설날」[1947]은 ‘10월 인민 항쟁’으로 투옥된 노백용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