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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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益守 |
영어음역 | Choe Iksu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영강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최익수(崔益守)는 1901년 8월 22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51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3월 11일 동구 좌천동에서 부산진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의 용감한 의거가 일어났다. 이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어 동래와 구포 등의 만세 운동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부산 지역민의 자주 독립과 항일 의식을 더 한층 높였다.
4월 초 당시 좌천동에 살고 있던 최익수와 김태곤(金兌坤)·박성해(朴聖海) 등 16명은 부산 지역민을 규합하여 4월 9일과 10일 양 일에 걸쳐 좌천동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고 모의하였다. 이에 동래고등보통학교, 부산상업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남녀 학생들에게 독립 선언문을 교부하며 독립 만세 시위를 선동하다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검거되었다. 이 일로 최익수는 징역 3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최익수는 명지동의 중심지인 영강 마을[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동아의원(東亞醫院)을 개원하여 38년간 학교 공의(公醫)로서 지역 청소년들의 건강과 진료에 정성을 쏟았고, 빈곤한 명지 주민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 주는 등 인술을 베풀어 주민들에게 박애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최익수는 1978년 3월 15일 78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