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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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靑年會 |
영어의미역 | Dongrae Young Adult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동래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개설]
동래청년회는 1922년 설립되어 동래 지역 청년 운동의 중심 단체로 역할하다 1928년 동래청년동맹이 결성되면서 해산하였다.
[설립 목적]
동래청년회는 청년 운동을 활성화하고 신흥 사상의 기치 하에서 대중 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동래청년회는 1922년 1월 3일 동래청년구락부가 자진 해산하고 이어 2월 5일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창립 대회를 열고 총무 간사 겸 회장으로 조희수(趙熙守)를 선출하였다. 동래청년구락부에서 동래청년회로 조직을 전환함과 함께 1922년 4월 회관을 동래면 복천동 구 서서재(西書齋)로 이전하고 8월 대대적인 임원 개선을 하였다. 새 임원에는 총무부 간사 이석모(李錫模), 문예부 간사 이상열(李相烈), 오락부 간사 문복환(文復煥), 운동부 간사 박수형(朴洙衡), 서무부원 조희수·구형서(具瀅書), 회계원 김덕수(金德洙), 서기 한영교(韓永敎)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동래동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였다. 집행부의 연령도 17~18세, 또는 20세 초반으로 청년구락부보다 연령이 낮아졌다.
1923년 11월 동래기영회에서는 동래청년회에 회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기영회 소유 건물 한 채와 밭을 이관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엔 아직 동래 지역 여론 주도층인 기영회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고 사회주의 운동 노선이 자리 잡게 되면서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1925년 1월 3일 제7회 정기 총회에서 종래의 간사제를 위원제로 개편하고 동래기영회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등 혁신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기존 청년회의 혁신과 아울러 부·군 단위 청년회 통합과 청년연맹 결성이라는 전국적 청년 운동의 흐름 속에서 동래 지역에서도 1925년 11월 1일 동래청년연맹이 창립되고 동래청년회는 그 산하 단체로 들어갔다.
1926년 8월 16일 동래청년회 집행위원회에서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새로운 간부진을 선정하고 1927년 2월에는 동래청년회 자체 조직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부흥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동의 중심이 동래청년연맹으로 옮겨져 동래청년회 자체의 활동은 침체되었다. 동래청년회는 1928년 1월 26일 제14회 임시 총회에서 청년 운동의 통일을 위해 동래청년회의 해체와 동래청년동맹 창립을 결의한 후 준비 위원을 선정하고 해체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래청년회는 1920년대 초기에는 청년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다른 지역 청년회와 야구 경기, 연합 운동회 개최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민 현안과 관련된 활동, 수해 구제 의연금 모집 등의 활동도 하였다. 1923년에는 중앙의 물산 장려 운동에 발맞춰 동래 지역에서도 동래불교청년회와 동래여자청년회와 연합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선전문 배포와 노래 등을 통해 선전 작업을 하고 동래 유지들과 함께 대운동회를 동래 온천 대운동장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대체적인 활동상을 보면 지역의 다른 청년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순회강연 실시, 야학 운영 등 청년들의 실력 양성과 생활 개선 등 청년 조직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래청년회는 1920년대 초중반 동래 지역 청년 운동의 중심 단체로 전국적인 청년 운동의 변화상에 맞추어 혁신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래청년회의 구성원들은 동래 지역 사회 운동 전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