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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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炯贊 |
영어음역 | Gim Hyeongcha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2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지주, 자본가,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김형찬(金炯贊)은 1885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출신의 지주 출신 자본가이다. 1910년대 후반 부산과 경상남도의 많은 지주 출신들이 부산에서 상업에 투자할 무렵 김형찬도 태복상회(泰復商會)를 경영하였다. 또 1911년 5월 25일 봉래일기계(蓬萊一紀契) 설립에 참여하였고, 1918년에는 동래은행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감사[1918~1921년], 전무[1923~1930년], 이사[1923년, 1932년] 등을 맡았다. 1933년에는 동래산업조합을 만들어 전무이사를 맡아 식산계를 설치하고 부락 진흥회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동래군 농촌 진흥 운동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배경으로 김형찬은 사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12월 설립된 부산예월회 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3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발기인에 추종엽(秋鍾燁), 김병규(金秉圭), 오태환(吳泰煥)과 함께 동래 지역 대표를 맡았다. 1920년대에는 동래의 대표적인 전통 놀이인 색전(索戰)[줄다리기] 대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34년에는 위원장을 맡아 대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 동해안 철도의 동래면 통과를 위해 조직된 동해안선동래통과기성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또 1930년 동래 지역 사회 운동이 침체되자, 이의 부흥을 위해 동래 유지들이 조직한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서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이렇듯 활발한 사회 활동으로 동래 지역 내에서의 김형찬의 정치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이로 인해 1923년, 1926년, 1931년에 동래면 협의회원[읍회원]에 당선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동래읍 학교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래군 학교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고급자 교원을 정리하고 그 예산으로 학교 내용을 충실히 하는 동시에 무산 아동의 구제책을 강구하라고 군 당국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김형찬은 부산상공회의소 제1대 특별의원이 되었고, 1946년에는 동래의 대표적인 계모임인 동래기영회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