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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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正殷 |
영어음역 | Yun Jeongeun |
이칭/별칭 | 윤길은(尹吉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대리 마을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창석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정은(尹正殷)[1852~1920]은 1852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대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구포 명문가인 윤씨 집안의 장남으로 본명은 윤길은(尹吉殷)이다. 평소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하였던 윤정은은 1919년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접하자 68세의 노령으로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갈 때 구포면 화명리 출신이며 서울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던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면사무소 서기인 임봉래(林鳳來), 구포의 유지인 윤경(尹涇)에게 서울과 평양의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구포에서 만세 시위를 촉구하자, 지역 청년들의 주도로 거사가 진행되었다. 3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임봉래·윤경·유기호(柳基護)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 계획이 구체적으로 무르익어 갔다. 이 소식을 접한 윤정은은 청년들을 찾아가 격려하는 한편 밤을 새워 가며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윤정은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음력 2월 28일] 1,0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장터의 시위대 앞에 나서서 지휘하였다.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이 김옥겸(金玉兼) 등 청년 11명을 잡아가자, 3시경 윤정은은 임봉래, 변봉엽(邊奉燁)과 함께 군집한 시위대 1,200여 명을 솔선 지휘하여 구포주재소에 밀어닥쳐 ‘구금된 애국 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들과 함께 곤봉 등으로 구포주재소 유리문과 의자 등 기물을 파괴하고 돌을 던져 시설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방어 중이던 구포주재소 순사 미우라 요히라[三浦良平], 순사보 김순섭(金順涉), 부산헌병 분대 응원 헌병 2명을 구타하여 타박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정은은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 수비대 군인들에게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협박의 명목으로 연행되었지만, 인근 김해·양산·기장·동래 등지의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구포 장터 의거 주동자 42명의 재판 과정에서 본명인 윤길은 대신 일본 제국주의와 바로[正] 맞서서 싸우는 윤정은이 되겠다고 이름을 바꾸어 진술하기도 하고, 재판정에서 앞에 놓인 책상과 걸상을 걷어차면서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내가 왜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부당함에 항거하였다. 결국 기소된 사람 중 최고의 형기인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연로한 몸으로 고문에 굽히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듬해인 1920년 1월 19일 69세의 나이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은 채 부산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