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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중학 조선청년독립당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99
한자 東萊中學朝鮮靑年獨立黨事件
영어의미역 Scandal for Joseon Youth Independence Party at Dongnae Middle School
이칭/별칭 조선독립당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양중모|남기명|김일규|김진훈|이관수|김한협|김병현|문인갑|김영찬|백기호|허현|자일회|순국당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독서회를 조선독립당으로 개편
종결 시기/일시 1944년 8월연표보기 - 조직 발각, 체포
발단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동래중학교 학생들 독서회 결성
발생|시작 장소 동래중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60지도보기

[정의]

1944년 8월 부산 지역의 항일 조직인 조선청년독립당 당원들이 체포된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청년독립당은 1940년 11월 23일 부산 항일 학생 의거[일명 노다이 사건]에 참여한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독서회에서 비롯되었다. 동래중학교는 전통적으로 민족적 정서가 팽배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 내내 부산 지역 항일 학생 운동의 거점이었다. 1940년 겨울 동래중학교 재학생인 양중모(梁仲模), 남기명(南其明), 김일규(金一圭), 김진훈(金鎭焄) 등은 은사였던 허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항일적 저항 의식을 다지고, 사회주의 운동을 비롯한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독서 활동을 전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경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일본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던 1941년 겨울에 독서회 회원들은 김일규의 집에서 모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독서회를 개편해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42년 초봄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가진 이들은 당의 강령을 정하고 구체적인 부서를 정하였다. 1943년 조선청년독립당의 중심인물들이 졸업하면서 직접적인 행동을 전개하기 위해 구체적인 작전을 계획하였다. 국내외의 정세 조사, 청소년의 훈련, 병기의 탄약 제조 등에 각각 담당자를 결정하는 한편 자일회(紫一會), 순국당 등 항일 비밀결사와 연락 속에서 준비를 진행하였다.

1944년 8월 1일 이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3일 동안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군사기밀을 탐지한 것을 분석하여 계획을 세웠다. 거사는 일본군의 탄약고 폭파, 일본 군용 열차가 통과할 때 구포 다리를 폭파하는 것 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거사가 실패할 때는 일본군에 입대하여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1944년 7월 조선청년독립당의 지도를 받고 있던 순국당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조선청년독립당 조직도 드러나게 되었다. 순국당은 1944년 5월 1일 결성 때부터 조선청년독립당의 이관수(李觀洙)가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청년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8월 8일 이관수가 체포되고, 나머지 당원 9명도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결과]

1944년 8월 15일까지 김일규, 양중모, 남기명, 김병현(金柄鉉), 김한협(金漢俠), 이관수, 김진훈, 문인갑(文仁甲), 김영찬(金永瓚), 백기호 등 조선독립당원 10명이 모두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김영찬과 백기호는 석방되고, 나머지 8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일제는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을 매우 엄중하게 여겨, 가족 면회도 금지한 채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진훈은 결국 고문치사 당했으며, 김병현은 1945년 6월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나머지 6명은 모두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구류되어 있다가,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직후 8·15를 맞게 되었고, 이에 8월 16일 모두 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은 일제 강점기, 그 중에서도 가장 포학했던 말기의 전시 체제 속에서도 부산 지역에 항일 운동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동래를 중심으로 하는 부산이 항일 투쟁의 최전선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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