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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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殉國黨事件 |
영어의미역 | Incident of Dongnae Middle School Joseon Youth Independence Par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1944년 부산 지역의 항일 조직인 순국당 당원들이 검거된 사건.
[역사적 배경]
순국당은 1943년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인 차병곤(車炳坤), 박정오, 신정호 등이 만든 윤독회에서 비롯하였다. 이들은 차병곤의 사촌 형인 조선청년독립당 이관수의 영향을 받으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동시에 또래의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순국당은 윤독회의 회원과 동래중학교의 배관진, 배봉수 등이 결합하면서 항일 학생 비밀결사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1944년 5월 1일 신정호의 집에서 순국당을 결성하였는데, 당시 참석자는 13명이었다. 순국당은 민족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할 것을 강령으로 하고, 행동 목표로 고이소 총독의 암살, 일본군의 군사 시설 파괴, 일본인 집단 거주지의 방화, 은행 습격, 미군 공습 시 산불 놓기 등을 결의하였다.
5월 8일 이들은 영도 다리 난간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후 일본군 군용 철교 파괴 등을 도모하던 중 계획이 불가능해지면서 중국 동북으로 가서 항일 독립군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7월에 차병곤과 윤창석이 선발대로 먼저 함경북도 길주에 도착하고, 이어 박태권과 김수성이 합류하였다. 하지만 7월 25일 부산에서 순국당의 존재가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길주에서는 7월 28일 체포되고 8월 1일까지는 순국당원 전원이 검거되었다.
[결과]
순국당원들은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부산형무소 구치감에 구류되어 있었다. 그동안 혹독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으로 정오연은 옥사하였으며, 배광진도 1945년 봄에 보석으로 나왔으나 수일 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 1일 차병곤, 박정오, 신정호 등 3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8명은 기소유예 처분하였으나 귀가시키지 않고 부두 작업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8·15를 맞아 기소가 기각되고서야 비로소 8월 18일에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병곤 역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된 지 한 달도 못되어 순국하였다. 한편 순국당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조선청년독립당의 실체가 드러나, 조선청년독립당원이 검거 구속되는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순국당 사건은 악랄한 일제 강점기 말기의 전시 체제 하에서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 부산 지역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13명 당원 가운데 3명이 이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로 순국하게 되면서, 순국당 사건은 조선청년독립당 사건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 학생 항일 의거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