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845 |
---|---|
한자 | 車炳坤 |
영어음역 | Cha Byeongg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27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차병곤(車炳坤)[1928~1945]은 1928년 5월 15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272번지에서 태어났다.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한 이관수(李觀洙)와 내외종간이다. 부산진초등학교를 다녔고, 중국 둥베이[東北]로 갔다가 1943년 귀국하여 조선청년독립당에 가담하고 있던 이관수와 교류하면서 항일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인 박정오·신종호와 함께 윤독회를 결성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뜻을 함께 한 동지는 박정오·신종호·김수성(金守性)·전창호·정오연 등이었다.
차병곤은 부산실천상업학교 야간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에 동래 쪽에서도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배광진(裵光珍)·배봉수(裵鳳秀) 등이 합류하게 되면서 1944년 5월 1일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진 시장 인근에 있는 신종호의 집에 모여 항일 운동 단체인 순국당(殉國黨)을 결성하였다. 차병곤과 같이 부산실천상업학교를 다니던 남정기, 공작창(工作廠)에서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 아사모토[朝本]도 함께 하였다.
순국당은 국권 회복을 위한 행동 목표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 암살, 일본군 군사 시설 파괴, 일본인 집단 거주지 방화, 은행 습격, 미군 공습 시 산불 놓기 등을 결의하였다. 제1차 목표로 5월 상순 영도 다리 난간에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것은 성공하였으나 진해 근교의 군용 철교 파괴, 일본군 항공병이 되어 연합군 입대, 총독 암살 등의 계획이 불가능해지면서 만주 독립군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1944년 7월 선발대로 차병곤과 윤창석이 먼저 함경북도 길주군에 도착하였으나, 때마침 부산에서 순국당 검거 열풍이 일어나 7월 28일 검거되고 말았다.
차병곤은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부산형무소 구치감에 구류되어 있다가,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 1일에야 기소되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기소가 기각되었고 8월 18일 출옥하였다. 경찰 조사 중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45년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는 차병곤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결정하고 부산진교회 주관으로 진행하였다.
[묘소]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공동묘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 표창, 1995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