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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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仁甲 |
영어음역 | Mun Ingap |
이칭/별칭 | 곡암(谷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87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문인갑(文仁甲)[1923~2008]은 1923년 7월 11일에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87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래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에 참여하였다. 이날 일제의 민족 차별에 항거해 일어난 부산 항일 학생 의거[일명 노다이 사건]에 참여하여 정학을 당하였다.
1940년 동래중학교에서 김병현(金柄鉉)·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金一圭)를 중심으로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1941년 겨울에 이들은 김일규의 집에서 독서회를 강화하여 항일 학생 조직인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문인갑은 이때 조선청년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 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였다. 문인갑은 행동반이 되어 농민 지도, 국내 조사의 임무를 맡았다.
그 후 조선청년독립당의 당원들은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 방향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원 간의 연락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였다. 당원들은 1944년 8월 1일에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여 군사 기밀 탐지, 일본군 탄약고 폭파, 군용 열차가 통과할 때 구포 다리 폭파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그런데 계획을 실행하기 전 1944년 7월에 조선청년독립당과 관계가 있는 단체인 순국당(殉國黨)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탄로 나게 되었다. 이에 8월 들어 조선청년독립당 당의 조직도 드러나 모든 당원들이 체포되었으며 문인갑도 이때 체포되었다. 일제는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을 매우 엄중하게 여겨, 가족 면회도 금지한 채 조사를 하였다. 문인갑은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구류되어 있다가,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15 광복을 맞아 8월 16일 출옥하였다. 후진을 양성하고 수필가로 활동하다가 2008년 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