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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74
한자 東平縣城-
영어의미역 Site of Dongpyeonghyeonseong Fortress
이칭/별칭 당감동성,당감동 토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350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정면적 108,454㎡
소유자 국유
관리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청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부산직할시립박물관 1차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부산광역시립박물관 2차 발굴 조사 실시
소재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350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읍성 터.

[개설]

동평현(東平縣)은 원래 삼국 시대의 대증현(大甑縣)으로, 경덕왕동평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갑화량곡현(甲火良曲縣)[기장현]과 함께 동래군에 소속된 영현(領縣)이다. 동평현성 터가 있는 동쪽으로는 금용산 줄기가, 멀리 동쪽으로는 황령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사병산이 구포 쪽으로 연이어 있어 산과 강으로 적절히 엄폐되어 입지적으로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동평현성은 고려 시대에 동남해안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로부터 동평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읍성이다. 구릉지의 외곽을 중심으로 그 남쪽 평지 일대를 포함하는 남북 장축의 평면 타원형에 가까운 평산성(平山城)이다.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동평현성동래현의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264보(步), 성내에 샘 1, 연못 4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각 지리지에서는 동남은 석축(石築), 서북은 토축(土築)으로 된 성으로 규모는 3,508척으로 나타나 있다.

1963년에 발간된 『동평현성지 일대 유적 조사서』에 따르면 성터의 남북 직경이 448m, 동서 직경이 305m이고, 성 주위는 1,350m, 성 면적은 10만 8454㎡이었으며, 동쪽·서쪽·남쪽에 3개 문의 흔적이 보이는데 그 중 남문이 제일 컸다고 한다. 당시에도 동남은 석축, 서북은 토축이 확연하였으며, 동남쪽의 석축 성지의 경우 성내는 대체로 성 바깥보다 3~4m 높고 성의 너비도 3m 전후였다고 한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폐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미 퇴비(頹圮)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1454년(단종 2)에서 1530년(중종 25) 사이에 폐성된 것으로 보이며 최소한 조선 전기 이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동평현성 터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동평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남쪽과 서남쪽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동평현성 터는 부산직할시립박물관 이 두 차례에 걸쳐 긴급 수습 조사를 실시하였다. 1992년 부암~당감동 간 우회 도로 개설 공사 구간에 성의 일부가 포함됨에 따라 남쪽 성벽을 조사한 1차 발굴 조사에서 세 차례에 걸쳐 축조한 성벽과 남문지,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1995년 2차 조사에서는 서문지와 서북쪽 성벽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은 직경 20~30㎝의 나무 기둥과 틀을 길이 420~430㎝ 간격으로 기단부의 석열 사이에 설치하여 목판을 대고 마사토와 점토를 교대로 다져 넣어 구간별로 판축(版築)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은 세 차례 개·보수하였다, 시기와 지형에 따라 성벽의 너비는 다른데, 1차가 8.5m, 2차가 7.5m, 3차가 6.0m이다. 남문지는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차 성벽의 문지 석축이 무너진 뒤 그 상부로 문지의 초석(礎石)이 사용된 3차의 문지가 조성되었으며, 초석과 기와의 분포로 보아 3차 성벽이 축조된 때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서문지의 경우 내벽과 외벽의 중간 지점에서 문지의 초석이 확인되었으며, 문지 초석의 2m 남쪽 지점에서 1차 성벽의 토층이 단절되고 상부에 성벽과 직교하는 석축열이 확인되어 서문 역시 개·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남쪽 배수구는 바닥에 납작한 석재를 깔고 너비 60㎝의 깬 돌을 좌우에 1~2단 쌓고 상부에 넓적 돌을 덮은 것으로 그 위에 깬돌을 깔고 점토로 밀봉하여 누수로 인한 붕괴를 방지하였다. 출수구(出水口)의 크기는 70×40㎝이다. 1차 축조 퇴적층에서 녹청자 그릇이 출토되었고, 그 위층에서 청자 및 분청사기,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대평(大平), 남면동래군(南面東萊郡), 문개(文盖), 삼품(三品) 등의 명문 기와들이 확인되었다.

그 중 대평은 요(遼)나라 연호인 태평(太平)[1021년~1030년]으로 추정되며, 인수부(仁壽府)[1400년, 1457~1556년] 명(銘) 분청사기도 출토되어 동평현성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396년(태조 5) 8월 왜선 120척이 경상도를 침략하여 병선 16척을 빼앗고 수영 만호를 살해하였으며, 동래·기장·동평현성을 함락시켰고 27년 뒤인 1423년(세종 5)에 부산포진이 동평현으로 옮겨왔던 사실은 기존의 성을 수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황]

1960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곳 주변에는 논이었으며 성벽은 약 2m 이상 잔존하였는데, 현재 성내에는 아파트와 교회,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발굴 조사된 성벽은 백양 터널로 연결되는 부암~당감동 간 도로와 당감동 주공아파트 쪽으로 통하는 도로 개설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성내 서북쪽의 평야에 동평현령 동헌 터, 북쪽에 견강사(見江寺) 터, 영소사(永嘯司) 등이 있었으나 현재 영소사와 동평현령 동헌 터만 확인된 상태이며, 동평초등학교 동남쪽으로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잔존 성벽과 성내 건물지의 확인을 위한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

[의의와 평가]

동평초등학교 일대에는 1982년에 조사된 당감동 고분군이 있었으며, 5세기 후반대로 편년되는 유물이 출토되어 동평현성에 관한 문헌 기록과 함께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오를 수 있는 유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병지에 1021년(현종 12) 동래군성을 수축하였다는 기록과 출토 유물로 볼 때 고려 초기에는 이미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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