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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다 분키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29
한자 坂田文吉
영어음역 Sakada Bunkichi
이칭/별칭 사카다분키치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초장동 2가 32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경상남도 도회의원
출생 시기/일시 1876년 5월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3년 -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가업인 판전상점을 인수하여 수출 무역에 종사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부산창고회사 취체역, 부산전등주식회사 취체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부산실업야학교 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부산교육회 회장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판전상점 재목부 설치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부산부협의회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8년~1928년 - 부산연거래시장 조합장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부산일보사 취체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부산요업회사 사장, 부산곡물신탁주식회사 전무취체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2년~1928년 - 부산 제1금융조합장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부산곡물상조합장, 대일본미곡회 조선지부 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조선방송협회 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부산체육협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부산부회의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경상남도 도회의원에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자로 선정
출생지 일본 후쿠오카 현 팔녀군 상광천촌[福岡縣 八女郡 上廣川村]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서구 초장동 2가 32
학교|수학지 동경고등사범학교 - 일본 도쿄도
활동지 부산수산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교동 3가[구 부산부 대교통 3정목 76]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실업계의 거두.

[가계]

사카다 분키치[坂田文吉]은 1876년 5월 일본 후쿠오카 현 팔녀군 상광천촌[福岡縣 八女郡 上廣川村]에서 판전여시(坂田與市)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판전여시는 부산의 유력한 무역상으로, 판전상점을 설립하여 자본을 확대하였고, 초기 거류민회 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사카다 분키치는 1903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1905년경 아버지로부터 가업인 판전상점을 인수하여 수출 무역에 종사하였다. 1906년 부산창고회사와 부산전등주식회사의 취체역을 역임하였다. 부산전등주식회사는 교토전등회사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으로, 1910년 부산의 전기·가스·철도를 통합 경영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에 매수되었으며, 매수금이 주식으로 전환되어 사카다 분키치는 이 회사의 주주가 되었다. 1907년 사카다 분키치부산수산회사 중역이 되어 1942년까지 줄곧 대주주 또는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4월 사카다 분키치는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하여 도매할 목적으로 판전상점에 재목부를 설치하였다. 1914년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감사역으로 활동했으며, 1918년 5월 조선에서 처음으로 부산연거래시장(釜山延去來市場)을 창설하여 1928년까지 조합장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부산일보사 취체역[이사]으로 복무했으며, 1920년에는 부산요업회사 사장과 부산곡물신탁주식회사 전무 취체역[전무 이사]을 역임하였다. 1922년에는 부산 제1금융조합장에 취임하여 1928년까지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부산곡물조합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일본미곡회 조선지부 부장에도 취임하는 등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사카다 분키치는 자치 조직 분야에서도 활발한 족적을 남겼다. 1906년부터 부산거류민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거류민단제가 폐지될 때까지 줄곧 의원으로 활동하며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힘썼다. 또한 1906년부터 일본인으로만 이루어진 부산상업회의소의 평의원과 상의원, 부회두를 역임했고, 1916년 조선인과 합동한 부산상업회의소에서는 1920년대 2차례 평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14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제’에 따라 부협의회가 설치되자 매회 당선되었고, 1931년 부회로 전환된 이후에도 줄곧 당선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33년부터는 관선 경상남도 도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20년대 부산의 최대 정치적 이슈였던 전기 사업 부영화(府營化) 문제에 대해 이를 지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카다 분키치는 교육·문화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908년 7월부터 부산교육회 부속 부산실업야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경영난에 빠진 학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경비를 대는 등 경영 및 교육을 주관하였다. 동시에 1910년부터 부산교육회장에 취임하여 1930년 사임하기까지 일본인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사비를 들여 보트를 건조하고 부산 체육관을 창설하여 청소년들에게 각종 체육 활동을 장려했으며, 1920년 부산무덕회를 설립하고 부산 무덕관을 건설하여 청소년 및 청장년층의 체력 증진에 기여하였다. 더불어 1928년 부산체육협회를 신설했고, 1929년 부산부청년단연합회 회장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대일본무덕회 부산지부를 설치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방송협회 이사, 조선나병예방협회 설립위원 및 평의원, 경상남도 농촌지도위원, 경상남도 동부교통협회 회장, 부산국방의회 부회장, 조선총독부 임시치수조사회 의원, 경상남도 마약중독예방협회 평의원 등 전 분야에 걸쳐 활발히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자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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