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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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甑山倭城- |
영어음역 | Zeongsanwaeseong-teo |
영어의미역 | Site of Jeungsan Castle |
이칭/별칭 | 부산 왜성,범천 증산성,증산왜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36번길 46[범일동 산81-28]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및 범일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축조한 왜성 터.
[개설]
증산 왜성은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4일 임진왜란으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본성인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왜장(倭將)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허물고 서북쪽에 있는 증산(甑山)[130m]에 쌓은 왜성이다. 증산의 정상부를 삭평하여 남북 약 520m, 동서 최대 폭 약 190m의 본환(本丸)을 설치하였다. 그 아래쪽 동서 방향으로 2~3단을 이루며 남북으로 능선을 따라 좁고 길게 성벽이 둘러져 있다. 부산포 해전이 있었던 1592년 음력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당시 부산진성 내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일본군의 가옥 주위에는 흙을 쌓아 새집과 같은 것이 100여 호 정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 밖 동서 산기슭에도 집과 담이 연하여 300여 호가 있는데 그 중심에 절과 같이 큰 층계의 회벽 건물이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증산 왜성에는 전시에 장수가 지휘하는 곳[천수각(天守閣)]을 비롯한 토성과 해자 등 기본적인 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기록을 보면 본격적인 축성은 1593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약 1만 명 정도가 성을 쌓는 데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증산 왜성의 방어를 보강할 목적으로 동쪽 직선거리 약 1㎞ 지점 외곽에 자성대 왜성(子城臺倭城)이 있으며, 절영도에 추목도단성(椎木島端城), 용미산(龍尾山)에 출기단성(出崎端城) 등 여러 개의 보루를 설치, 운영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지성[거점이 되는 본성을 지원하는 별개의 성]들은 시가지로 바뀌면서 현재는 멸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증산 왜성 터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증산 체육공원 내 농구장을 중심으로 동북 쪽은 동구시민도서관, 서쪽은 테니스장, 동쪽은 좌성초등학교 뒤, 남쪽은 좌천 아파트 아래 유치원까지 해당된다.
[현황]
전체적으로 남아 있는 성벽은 3~4단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의 아래쪽에 석축이 남아 있다. 증산의 가장 높은 본환의 서쪽 모서리에는 천수각이 있던 자리로, 남쪽의 일부 보수한 곳을 제외하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농구장을 비롯한 체력 단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쪽 중앙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안쪽에 방형(方形)으로 둘러쌓은 작은 성의[내옹성문(內甕城門)] 흔적이 보이며, 외곽은 대체로 잘 남아 있는데 측면 방어에 유리하도록 성벽이 꺾여 있다.
본환의 동쪽으로 제2곽[성내 구획된 일정한 공간]과 제3곽이 높이 4~5m 정도 단의 차이를 보이며 길게 뻗어 있는데, 석축 연장 1,200m로 남아 있는 높이는 5.3~6.3m이다. 제2곽의 외곽도 남쪽의 경우 높이 4m 정도 석축이 남아 있으며, 동북쪽으로도 높이 2m 정도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는데 현재 노인들의 게이트볼장과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제3곽은 증산 체육공원 입구로 그 동쪽은 최근에 건립된 동구시민도서관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제3곽의 남쪽 석축은 대부분은 산책로의 옹벽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높이 2m 정도의 원 성벽이 남아 있다. 제3곽의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4곽에는 좌천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어 성벽은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파트의 동쪽 계단에 있는 유치원 뒤편의 문터에는 높이 5m이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증산 왜성은 일본군의 병력과 물자의 보급 및 본국과의 연락 등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중요한 병참 기지로서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또한 왜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이 있던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