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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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奎甲 |
영어음역 | Jo Gyugap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분절 마을 111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부산 출신의 제헌 국회 의원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1904년 3월 27일 경상남도 김해군 녹산면 분절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남강(南崗) 조정환(曺正煥)은 민국독립단의 자의부장(諮議部長)을 지내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다물단을 조직하는 등 중국 동북 지방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숙부는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활동했던 해산(海山) 조성환(曺誠煥)이다. 3남 6녀의 자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규갑(曺奎甲)은 어린 시절 대대로 한학을 공부한 집안 내력으로 인해 경상남도 김해군 진례면의 시례강습소에서 한문을 배웠다. 하지만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되는 망국의 설움을 겪으면서 일본의 힘을 몸소 느낀 조규갑은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수학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정경과를 수료하였다.
이후 조규갑은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동양철학과에 입학했는데, 베이징대학은 독립 운동을 하던 중 1927년 행방불명된 아버지 조정환이 『장자(莊子)』를 강의한 곳이기도 하다. 베이징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조규갑은 경상남도 창원군 구산면 면장과 진해어업조합장, 진해금융조합장, 창원군 농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8·15 해방 이후 조규갑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남도 창원지부 지부장 및 진해지부장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이자 제헌 국회 의원을 뽑는 총선거에 경상남도 김해 을(乙)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제헌 의원 시절에는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국책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조사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법무부 장관 이인 등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다소 우호적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鐘泌)이 주도하여 1963년 1월 재건당(再建黨)[민주공화당의 모체]을 창당하자 조규갑은 전직 국회 의원 54명과 함께 입당하여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규갑은 1972년 10월 유신 헌법이 발표되자 제헌동지회 50명과 함께 유신에 찬성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91세이던 1994년 10월 3일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안산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9년에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