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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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律 |
영어음역 | Yi Jongryul |
이칭/별칭 | 이상(李象),도성(度聲),정약당(靜若堂),산수(山水),선교공남(汕僑空男),태양(太陽),남철(南鐵),이남철(李南鐵),철생(銕生),이균(李鈞),옥교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100-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선미 |
[정의]
6·25 전쟁 이후 부산에서 활동한 교수이자 민족 혁명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도성(度聲)·산수(山水)·선교공남(汕僑空男), 호는 정약당(靜若堂). 아명은 이상(李象)이다. 태양(太陽)·남철(南鐵)·이남철(李南鐵)·철생(銕生)·이균(李鈞)·옥교량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고, 임괴(任傀)·신호(申皓)·이일구(李一九)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부인 최명(崔明)과 이혼하고 송교(宋喬)와 사별한 뒤 민숙례(閔淑禮)와 결혼하여 이우창(李雨蒼), 이우육(李雨六), 이우인(李雨人), 이우눌(李雨訥), 이우기(李雨紀), 이우사(李雨史), 이우주(李雨洲) 등 2남 5녀를 두었다.
1902년 6월 6일[음]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에서 아버지 이규환(李圭煥)과 어머니 벽진 이씨(碧珍李氏) 이점실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이규환의 자는 덕지(德之)이고, 호는 퇴하(退下)·벽남(碧楠)이다. 이규환의 가족은 1917년 무렵 포항 일대를 휩쓴 유행병을 피해 의성으로 이주하였다가, 1920년대 중반 영덕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1. 일제 강점기 학생 운동
이종률(李鍾律)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상당한 수준의 한학을 익힌 뒤 1921년 점곡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애국지사 박명진(朴明璡)을 통해 근대적 민족주의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일본식 교육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고, 얼마지나지 않아 안동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한 동명학교에 진학하였다.
동명학교에서 석주 이상룡의 조카이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한 이형국(李衡國), 대한광복회 단원인 유동붕(柳東鵬), 조선공산당과 건국준비위원회 안동위원회에서 활동한 이지호(李遲鎬) 아래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대한광복회의 열성분자로서 1918년 박상진의 장승원 처단에 참여한 이종영(李鍾韺)의 집에서 김두봉의 『한글 말본』을 접하였다.
1924년 봄에 이종률은 서울로 가서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고학생의 상호 부조 단체인 고학생갈돕회의 회원이 되었다. 12월 북풍파의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5년 5월에는 ‘민중 본위, 민족 본위의 사회 과학 연구’를 내건 최초의 사회 과학 연구 학생 단체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6월에는 북풍파의 맹장인 김종범과 김병로 등을 발기인으로 설립된 시사 잡지 『정론(正論)』을 발간하는 정론사의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악덕 친일 기업가의 비리를 실은 『정론』의 기사로 인해 김종범이 피신하고 이종률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정론사 운동은 막을 내렸다. 10월에는 일제 경찰이 공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이에 항의하던 이종률은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 무렵 이완용(李完用)에게 학자금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사건으로, 일제의 ‘사상 요시찰인 연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결국 이종률은 학자금 부족을 해결하지 못하고 11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봄에 경신학교(儆新學校) 4학년에 편입하였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7월에 다시 퇴학당하였다. 4월 28일 송학선(宋學先)이 사이토[齊藤] 총독을 살해하려 한 사건으로 일제가 벌인 대대적인 예비 검속에서 이종률은 경찰서 유치장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유치장에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만나 항일 운동가의 의기(義氣)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생겼다. 연말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12월 5일 강원도 이천군 판교면에서 명덕청년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역임하면서 청년 운동에 몰두하였다.
1927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활동 무대를 일본으로 옮겼다. 이종률은 조선유학생학우회 소속으로 2월에 조선인단체협의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부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인단체협의회는 5월 신간회 도쿄지회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조직으로, 이종률은 신간회 도쿄지회의 간사를 역임하고 정치 문화부에서 활동하였다.
신간회 도쿄지회에서 의열단원 박시목(朴時穆)[일명 박건(朴建)], 백산 안희제의 아들 안상록 등과 함께 활동하였는데, 이때 남철·이남철·태양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 이종률은 매우 진보적인 여성관을 바탕으로 여성 문제 강좌를 개설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력으로 근우회 도쿄지회를 비롯하여 근우회 지회의 활동에도 깊숙이 간여하였다. 여름 방학에 조선으로 돌아와 유학생 순회강연에 참여하는 한편, 중국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고 돌아와 신간회 밀양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을 역임하던 백민 황상규(黃尙奎)와 만나 밀양 지역의 의열단 계열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2. 일제 강점기 청년 운동
1928년 3월 신간회 도쿄지회에 조응하는 민족 협동 전선 성격의 청년 단체로서 재일 조선청년동맹을 결성하였으나 조직을 크게 확장하지는 못하였다. 7월에 박노수(朴魯洙)[일명 박야민(朴野民)]와 함께 조선교육신문사를 설립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경성고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 운동을 지원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지원하기 위해 도쿄의 조선교육신문사를 통해 제작한 유인물을 밀반입하여 배포하였는데, 이것이 1928년 11월의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 사건’이다. 이는 학생 맹휴에 대한 일본 유학생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서울과 도쿄를 연계한 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는 방청석이 만원을 이루었다.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 사건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처음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종률은 출소한 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는데, 1930년 4월 14일 사회실정조사소를 창립한 것이었다. 사회실정조사소는 조선 사회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사회 운동의 논리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종률과 안균 등 중심인물이 노동절[메이데이] 격문 살포의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사회실정조사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931년 7월 기관지 『이러타』[이렇다]의 창간으로 재개되었다. 이종률은 월간지 『이러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 1년 만에 전국 28개 지역에 지국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1933년 4월 이종률이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중단되었다. 형평청년전위동맹은 1923년 결성된 형평사 내 급진파의 중심을 이룬 비밀 결사로, 이종률은 이들에게 사상적 지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악랄한 고문 및 일제 사법 체계의 반인권성과 잔혹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피의자 가운데 한 명이 고문사하였으며, 이종률 역시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였다. 더욱이 이종률은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34년 5월에 발생한 ‘미야케 교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하던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가 탈주한 사회주의자 이재유를 은닉하다 발각되자, 일본 경찰이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를 중심으로 한 적화 공작 사건을 조작한 일이었다. 평소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와 가까이 지내던 이종률이 여기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6년 6월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아 이미 3년 2개월여를 복역한 이종률 역시 곧바로 출옥할 수 있었다.
이후 이종률은 1938년 9월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학생 비밀 결사 상록회를 지원하는 등 학생 운동을 후원하는 형태로 활동을 전환하였다. 그나마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에 의한 감시를 받는 몸이 되자, 1940년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으로 들어갔다. 용문산에서 숯 산판을 경영하면서 강제 징집을 피해 온 청년들을 규합하면서 일제 강점기 말을 보냈다.
3. 해방 후 사회 운동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였다. 새로운 활동은 백남운이 주도하는 조선학술원의 창립으로 시작하였다. 이종률은 설립 준비 위원으로 8월 16일 조선학술원 창립에 참여하였고, 창립 후에는 학술원의 중추 기관인 서기국의 위원이자 상임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학술부에서는 역사 철학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 무렵 이종률은 이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46년 3월 조선문화단체총연맹[문련]이 주최하는 ‘맑스 서거 63주년 추모 강연회’에 학술원 대표로 참가하여 강연을 하였고, 백남운의 정치 활동에 이론적·조직적 기반이 된 민족문화연구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편으로 인류애와 평화를 추구하며 창조된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운동을 오랫동안 지지해 온 이종률은 1945년 12월 15일 에스페란토조선학회가 결성되는 과정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강좌 개설 등을 통해 에스페란토어의 선전과 확산에 힘썼다.
1946년 1월 5일 이종률은 박진,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건양회(民族建揚會)[약칭 민양]를 발기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로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분단을 막고 변혁 운동을 주도할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발의한 준비 조직이다. 민족 건양은 ‘민족 사회를 혁명적으로 건설하여, 이를 보다 높은 역사 단계로 지양한다’는 의미로, 이종률의 민족 혁명론을 함축한 용어이다.
이해 가을 이종률은 여운형(呂運亨)을 테러에서 구해 준 일을 계기로 여운형과 함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47년 2월 이극로(李克魯)·조봉암(曺奉巖) 등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약칭 독전]을 결성하였다. 분단은 곧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질 것을 예견하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이 분단과 전쟁은 현실화되었다.
4. 1950년대 교육, 언론 운동
전쟁이 일어나자 이종률도 피난길에 올랐는데, 1951년 초 대구를 거쳐 경상남도 함양군으로 피난하여 안의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이듬해인 1952년 봄 최익환과 박진목이 부산 등지에서 펼친 종전 운동에 논객으로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이후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지에서 인상적인 강의로 명성을 얻으며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중반 민족 자주 의식을 대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단체로 민족문화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김정한(金庭漢), 이주홍(李周弘), 최종식(崔鍾軾)을 비롯한 부산의 양심적 지식인과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교체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자 이종률은 서울로 가서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이를 위해 신익희(申翼熙), 조봉암, 김창숙(金昌淑)의 명륜동 회담을 주관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신익희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정권 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다.
1957년 부산대학교의 학생 신문인 『부대 신문』에 주간 교수직이 신설되자 이종률은 초대 주간 교수로 취임하여 1959년까지 재임하였다. 또한 1950년대 후반에 부산의 『국제 신보』와 『부산 일보』의 논설 고문을 지냈고, 대구 『영남 일보』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언론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50년대 후반 부산에는 이종률을 구심으로 하는 민족 혁명론 학맥이 형성되었다.
1958년에는 간첩 불고지죄라는 분단의 올무에 갇혀 또다시 곤욕을 치렀는데, 남파된 간첩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김창주로 이종률의 오랜 벗이었다. 이 일로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부산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와세다대학 동문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5. 4.19와 통일 운동
1960년 이종률은 4월 19일 시위를 기점으로, 학생 시위가 전 국민적 항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새로운 정치 국면이 도래하였음을 직감하였다. 이에 4월 21일 서울로 가서 민족건양회를 소집하여 ‘4월 목요 회의’를 개최하고 정국 변화에 따른 대응을 논의하였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6월 12일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 청년층의 결집을 내세우고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을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이종률의 제자들과 부산 지역의 진보적 청년층이 대거 참여하였다.
동시에 서울로 중앙 맹부를 이전하고, 이듬해인 1961년 3월 4일 대구에 경상북도 도맹부를 결성하였다. 서울의 중앙 맹부는 이수병 등 암장 그룹이 중심을 형성하였고, 경상북도 맹부는 서도원·도예종(都禮鍾)·송상진 경상북도 지역 청년계의 중심인물이 주도하였다.
민족건양회와 민주민족청년동맹을 기반으로 이종률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를 결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여기에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 정계와 통일민주청년동맹준비위원회[약칭 통민청]를 비롯한 진보적 청년 단체 및 천도교 등 종교계와 사회단체가 합류하면서, 1961년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창립되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는 통일 방안을 연구하기 위한 부설 기구로 통일방안심의위원회를 두었는데, 이종률은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남북 협상 통일론을 설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시에 학생층의 통일 운동을 주도한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의 발족을 지원하고 사상적으로 지도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종률은 1961년 2월 13일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내세우고 등장한 『민족 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이종률은 ‘민족 일보’라는 제호의 결정을 주도하고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6. 5.16 이후
하지만 4·19 혁명 시기의 이러한 활동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이후 반(反)국가 행위로 단죄되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에 이종률은 군사 정권의 혁명 재판소에서 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과 『민족 일보』 사건에 피의자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울 형무소와 마포 교도소 및 안양 교도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렀으며, 1965년 12월 25일 형 면제로 석방되어 부산으로 돌아왔다.
1970년 이종률은 양산의 개운중학교[현 효암고등학교] 교감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교육 운동을 통해 흩어진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지인들을 결집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1974년 백산 안희제의 사적을 답사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후 15년 동안의 투병 생활 속에서도 후학들에 대한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던 이종률은 1988년 3월 13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의 자택인 수일원(秀一苑)에서 영면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학문 이형국의 죽음을 적(吊)함」[『비판』 제3호, 1931. 검열로 삭제], 철생 왈, 「활약할 우익파와 고전할 좌익파」[『이러타』 창간호, 1931. 검열로 삭제], 남철, 「레닌은 과연 맑스를 끛었는가」[『이러타』 1권 2호, 1931. 검열로 삭제], 남철, 「원고 쓰는 방법」[『이러타』 1권 3호, 1931], 남철, 「의회 및 제60의회란 이런 것이다」[『이러타』 2권 2호, 1932], 남철, 「이데올로기론」[『비판』, 1932년 12월. 검열로 삭제], 인기학회(人紀學會), 『인기학 소론』[1946], 신호, 『현 정치 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혁명 『정전개』 캄파 조직의 제소로서』[1949]가 있다.
그리고 김남식·이정식·한홍구, 『한국 현대사 자료 총서』 10[돌베개, 1986], 이종률, 「Keynes경의 인식을 위한 일 시론」[부산대학교 『십 주년 기념 논문집』, 1956], 이일구 편저, 『현 순간 정치 문제 소사전』[국제신보사, 1960], 이종률, 「조국을 세우기 위한 투쟁의 일생-김시현 선생과 그 영부인의 전기」[1961], 문한영, 「반보수 민족 혁명 세력의 강화 방향」[『신시대』 1월, 1961. 이종률의 글], 이종률, 『조국사의 분렬과 통일의 주조』[통문관, 1971], 이일구, 『기미를 알자』[무림사, 1979] 등이 있고, 이 외에 현존하는 다수의 유작 원고가 부산 민주 공원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46번지 백운 공원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0년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2005년 부산대학교 10·16 기념관 앞에 탄생 100주년 기념식수와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민인사연구회가 『민족 혁명론』[들샘, 1989],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에서 『산수 이종률 저작 자료집』 1·2[들샘, 2001·2002], 한국에스페란토협회에서 『에스페란티스토 민족사인 이종률 선생』[2011]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