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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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植民地工業化 |
영어의미역 | Industrialization of a Colony|Wartime Industrialization in Colonial Busan |
이칭/별칭 | 군수공업화,병참기지화,대륙전진병참기지화,전시공업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호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추진된 공업화.
[일제 강점기 부산의 공업화]
부산에는 개항기부터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하사마 후시타로[迫間房太郞] 등이 부산으로 건너와서 부동산과 여관업, 정미업, 미곡 수출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였다. 강점 이후에는 경남은행[1912], 부산상업은행[1913], 조선화재해상보험[1922], 부산미곡증권신탁[1922] 등 금융 보험업을 비롯하여 조선전력[1935], 조선와사전기[1910], 남선합동전기[1918], 부산요업[1920], 일본경질도기[1920], 조선송전[1928], 조선제빙[1936]) 등 전기, 송전, 도자기 등 소규모 경공업 방면 혹은 상업 금융 방면의 일본인 기업이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경질도자기와 부산요업과 같은 도자기 공업이 비교적 큰 기업체였고, 직물 회사로는 조선방직[1917]이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3만 2,000㎡[4만 평]의 부지에 설립되어 한 때 4,0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할 만큼 손꼽히는 기업이었다. 1930년대부터 조선총독부가 농공 병진·대륙 병참 기지화 등의 논리를 내세우며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하자 영남 지역에서 남선 공업 지대라고 하여 부산, 울산, 마산, 진해 등이 포함된 공단이 발전하였다. 1935년 전선(全鮮) 공업자 대회를 부산에서 개최한 것도 공업화에 대한 부산 지역 기업가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부산 지역을 포함한 남선 공단은 1940년 즈음 조선 전체 공산액의 8.9%를 생산하고 있었다.
부산은 지리적 여건상 일본 본토와 연계되는 운송 기지였다. 이를 위하여 기존 경부선 외에 일본과 조선의 육로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도로 경경선(京慶線)[현 중앙선]이 1942년 4월 개통된 데 이어 경부선도 복선이 되었다. 그 결과 울산만(蔚山灣)이 부산의 보조항으로 주목을 받았다. 아울러 해로에서도 기존의 관부(關釜) 해로 외에 울유(蔚油) 루트[야마구치 현 소재 유야 만과 조선의 울산만을 잇는 루트]가 새로이 기획되었으며, 1943년에는 부산항에서 철강 및 철광석 수송 능력을 강화하도록 만주국 대련에서 설비를 가져왔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하였다.
1943년 이후 엔블록에 집중적으로 의존하던 일본은 긴급한 물자의 경우 기존의 해운 노선을 대신하여 대륙 철도와 연결하여 조선의 중계지를 경유한 다음 일본 본토로 집중하도록 하는 남선중계 대륙전가 하물 운송을 강화하였다. 대륙 전가 하물의 월 평균 규모는 39만 6,147톤인데, 운송 코스는 안봉선-경의선-경부선 등 대륙 철도와 한반도 종관 철도였다. 그리고 부산은 본토로 가는 그것의 최종 중계 지점이었다.
[부산 공업화의 성격]
일제 강점 말기 조선 공업의 성격은 전쟁 공업이었다. 지역적으로 조선 북부는 만주 사변, 조선 서부는 중일 전쟁 그리고 조선 남부는 태평양 전쟁의 추이와 긴밀하게 연계된 공업화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1941년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부산 지역 공업의 획기적인 확대를 초래하였다. 이즈음 일본은 일본·만주를 잇는 ‘북선 블록’과 더불어 일본이나 남방[동남아]과 연계한 방적·고무 공업 등을 조선 남부에 확장하려고 하였다. 이에 부산에서는 1944년까지 용호만 적기(赤崎)에 대대적인 공업 용지 조성 사업을 벌였다.
시기별로 보면 1937년 7월 자본금 300만 원으로 조선중공업주식회사[현 한진중공업]가 설립되었고, 1942년 11월에는 여기에 통제회 조선지부가 설치되었다. 부산에서는 1942년 초까지 주로 식료품·목재·어업 용구 제작소 등이 입주했고, 194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메리야스·직물 등 소비재 공장이 입주하였다. 1944년 말까지 조선총독부의 일본 본토 기업 이주 대책에 따라 조선어망 부산공장 등이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말 부산에서 가동 중인 방직·요업·정곡업·양조·제염·제재·조선업 등 약 400여 개의 공장의 생산액은 1억 원 정도였다. 일본 본토에서 중소기업·소비재 산업을 정리하자 이를 피해 일본 기업이 대거 조선으로 이주한 것이 원인이었다.
부산의 대표적인 조선인 기업가는 구포 출신으로 1912년 최초의 지역 은행인 구포은행을 창립한 윤상은(尹相殷),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중소 지주로 1915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칭]하고 1919년 조선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한 안희제(安熙濟),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와서 1940년 부산합동정미를 창업한 신덕균(申德均), 1935년 조선지기주식회사(朝鮮紙器株式會社)를 창립하고 1943년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한 김지태(金智泰) 등을 들 수 있다.
부산항은 남방 지역의 교두보로서, 남방의 자원과 결합하여 기업을 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염원은 제9회 전선 공업자 대회에서, 증산과 더불어 남방 엔블록과의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자는 부산공업구락부의 제안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부산 지역 자본가들의 동남아에 대한 관심을 보면 1942년 6월 20~25일간 부산부가 동남아로 이주할 기업자들의 신고를 받았을 때 출원한 45명의 면모를 보면 주로 잡화상·과자상·섬유상 등 중소기업가였다. 이들은 동남아로 진출하여 통제를 피해 보려는 측면과 아울러 일본의 점령을 기화로 동남아에 진출하여 원료 부족을 해소하고 자본 축적을 꾀하려 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인 자본가 계급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3년 이후 동남아 일대가 다시 연합군에 탈환되면서 이주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잠깐 동안이나마 증가하던 부산의 공장도 1944년 이후 닥친 기업 정비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식은 조사 월보』에 의하면 1944년 7월 부산에서 기업 정비가 단행되어 제1차로 14업종을 정비한 데 이어서 제2차로 전체 업체 가운데 60%를 정리하였다. 2차 기업에서 정비 규모는 전·폐업자 약 1만 명, 재고품 및 설비 매상 액고는 1900만 원 정도로 그 피해가 막대하였다. 1945년 이후 연합군의 B-29 폭격이 본격화되자 1945년 4월부터 부산 지역의 주요 건물·학교·설비의 소개(疏開)가 시작되었다.
부산의 소개지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일대, 동구 범일동, 부산진구 연지동과 양정동, 남구 감만동 등 행정 관청이나 공업 시설 그리고 인구가 밀집된 상가 주변 지역이나 경부 철도 주변 지역이었다. 번화한 지역을 소개지로 지정한 서울과 달리 부산은 철도 및 전차가 연결되는 지점을 중점 지정하고 있는데, 이는 물자 운송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45년 5월부터 시작된 기업 소개와 기업 정비분으로 인해, 해방 직전까지 약 50%의 기업체와 노동력의 63%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화의 귀결]
일제 강점기 말기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공업 정책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증산보다는 동원만이 강화된 구조적 수탈 정책이었다. 물론 일부에서 전쟁 특수로 부산부 권역이 확대되고 부산항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경부 지선 철도가 늘어 중국 동북과 본토에서 오는 중요 물자를 일본 본토로 이전하는 대륙 전가 하물의 종착 기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공업화의 대부분은 고무, 메리야스 등 동남아의 자원을 이용한 업종이나 전쟁 수요에 응한 소비재 산업이었고, 조선업(造船業)만이 특화되어 강철선을 띄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