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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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鍾哲 |
영어음역 | Bae Jongcheol |
이칭/별칭 | 성팔(聲八),광암(廣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 3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및 대중운동가.
[가계]
자는 성팔(聲八), 호는 광암(廣岩)이다.
[활동사항]
배종철(裵鍾哲)[1895~?]은 1895년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 38번지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에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강서구와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서 전개된 청년 운동과 농민 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배종철은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창립총회에 김해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1922년에 김해청년회 집행 위원으로서 조선청년회연합회 검사 위원이 되었다. 농민 운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김해농민연맹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1927년 9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 위원 후보에 올랐고, 1929년 3월에는 김해농민연맹 집행 위원장 자격으로 원산 총파업에 격려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김해농민연맹의 대표로 김해군 상동면 소작 쟁의를 주도하였고, 1931년에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진영의 하사마[迫間] 농장 소작 쟁의를 지원하였다가 검거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배종철은 신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신간회 김해지회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 2월에는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후배인 최원호(崔援浩)[2대·5대 국회 의원], 최여봉[건국준비위원회 김해지부 위원장], 백기룡 등과 야학을 운영하며 김해 출신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를 초청해 한글 강습회를 열었고 각종 연설회에 연사로 나서기도 하였다. 1929년 8월 김해청년동맹이 주최한 김해기생조합 설립 반대 연설회에서 연설하였고, 1929년 11월 러시아 혁명 기념 대강연회에서는 ‘노서아의 혁명과 무산 계급’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배종철은 1929년 2월 김해청년동맹이 운영하는 노동 야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신춘 대강연회에서 연사로 나서 항일적인 연설을 하다가 참석한 경관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에는 중추원 찬의 및 국민협회 간부인 오태환(吳泰煥)과 이동우가 민정 시찰과 사상 선도라는 명목으로 김해농업학교 강당에서 실시한 강연에 참가하여 날카로운 질문을 날린 까닭에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배종철은 김해 지역 대중 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되면서 항상 일제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29년 8월 김해 시민대회를 준비하던 중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경찰의 탄압을 받았고, 1930년 2월에는 김해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김해 반제(反帝) 격문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김해에 수해가 발생한 1930년 9월에 당시 김해농민조합장이었던 배종철은 수해 구제 의연금을 모집하다가 구속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12월에는 부산양화직공조합 작업부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김해의 재력가인 허발을 공갈하였다는 혐의로 송기송, 노백용(盧百容)과 함께 부산경찰서에 구속되었다.
1931년 5월에 일제는 노동절을 앞두고 배종철을 예비 검속하였지만, 농민 500여 명이 김해경찰서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동절에 격렬한 연설을 하고 전단을 뿌리며 세계 무산 계급 만세를 외치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많은 수가 검거되었다. 이후에도 김해경찰서는 1932년 4월 김해농민조합 정기대회의 표어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1932년 8월 김해농민조합의 해산을 강요하며 배종철을 또다시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러나 배종철은 이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1945년 해방 직후 주민들의 추대로 김해 군수가 되었지만 외세와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정국에서 며칠 만에 김해 군수에서 밀려나 서울 등지로 떠돌다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
[상훈과 추모]
국내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