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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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援浩 |
영어음역 | Choe Won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화전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정치인.
[활동 사항]
최원호(崔援浩)[1898~1980]는 1898년 4월 16일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화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상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김해청년회 회장이 되었으며, 1927년 여자야학회와 1930년 노동야학회를 설립하였고 형평 운동도 후원하였다. 1932년 낙동강 개수 공사가 3년간 연기되자 낙동강공사촉진기성회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33년 3월에 김해 낙동강 주변의 대저면·김해면·녹산면·가락면의 4개 면 대표자들이 가락면에 모여 낙동강 일천식 공사로 인한 해수 역류가 우려되어 조직한 해수방지회(海水防止會)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최원호는 해방 후 민주국민당 경남도당 위원장, 경상북도 상공국장, 김해산업조합 이사를 지냈다. 제헌 국회 의원 선거 때 김해 갑구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무소속의 신상학(辛相學)에게 근소한 차이로 졌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김해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와 1958년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 각각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4·19 혁명 후 1960년 7월 29일에 치러진 제5대 국회 의원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최원호는 1980년 2월 27일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최원호의 묘지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선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