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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19
한자 尹敬奉
영어음역 Yun Gyeongbong
이칭/별칭 윤봉경(尹奉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대리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7년 1월 25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19일 -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1년 11월 9일연표보기 - 윤경봉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건국포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출생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활동지 구포 장터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윤정은(尹正殷)이다. 윤정은은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사건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1년 3월을 선고 받았으며, 수감 중이던 1920년 1월 19일 69세의 나이로 옥사한 독립운동가이다. 윤경봉(尹敬奉)의 다른 이름은 윤봉경(尹奉敬)이다.

[활동 사항]

윤경봉[1897~1941]은 1897년 1월 25일에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윤정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윤경봉은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3·1 운동 소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에서 내려온 양봉근(楊奉根)이 독립 선언서를 전달해주고 시위를 부탁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임봉래(林鳳來), 윤경(尹涇), 윤정은(尹正殷), 유기호(柳基護), 손진태(孫晋泰) 등 많은 구포 청년과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정오 윤경봉은 아버지 윤경은과 함께 준비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분하고 장꾼들과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출동한 일본 경찰이 11명의 주동자를 체포해 가자, 윤경봉은 대오를 정비하여 시위 군중 1,200여 명을 이끌고 구포주재소로 쳐들어가서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의 기물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윤경봉은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11월 9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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