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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83
한자 金玉兼
영어음역 Gim Okgyeom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김옥겸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16일 -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19일 - 김옥겸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3년 5월 - 일본 고오베에서 불령선인으로 검속
몰년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김옥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출생지 김해 대동면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거주|이주지 구포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활동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본관은 김해. 김옥겸(金玉兼)[1892~1957]은 1892년 김해의 대동면에서 태어나, 성년이 될 무렵 구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평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던 김옥겸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항일 운동을 일으켜 여론을 환기하고자 하였다.

김옥겸은 3월 하순경 구포면사무소 서기였던 임봉래(林鳳來)와 구포의 유지인 윤경(尹涇), 유기호(柳基護)를 만나 구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동참하여 거사 준비를 주도하였다. 김옥겸을 비롯한 임봉래·유기호·윤경·김윤길(金潤吉)·허정(許楨)·김용이(金用伊) 등은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이수연(李守蓮)의 집과 기타 장소에 모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에 의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3월 29일 구포 시장에서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晋泰)·김장학(金章鶴) 등 청년 동지들에게 태극기와 반일 문서를 나누어 주고 운동을 주도하게 하였다. 박덕홍과 안화중(安華重)은 구포 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몰래 나누어 주는 한편 시장의 폐문을 호소하였으며, 정오를 기하여 구포 시장에 운집한 1,000여 명의 만세 시위를 성공시켰다. 김옥겸은 김윤길 등 여러 사람과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을 만나 “너는 한국인인데 왜 오늘의 시위운동에 가담하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곧 참가하라!”고 외치면서 민족적 양심에 촉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 김옥겸을 비롯한 주동 인물 12명이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분노한 군중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먹과 곤봉으로 구포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석으로 대항하며 격렬하게 맞서 싸워 동래와 기장 지방의 항일 운동을 가열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위의 결과 43명의 주동자가 보안법 위반과 소요 협박의 명목으로 검거되었다.

김옥겸은 체포 구금된 동지 42명과 같이 투옥되어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옥겸은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3년 5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검속을 당한 탓에 귀국하였다. 한동안 2·8 독립 선언 서명자의 한 사람인 양산의 김철수(金喆壽)와 교우하다가,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일제가 만주를 유린할 때까지 6년간 독립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957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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