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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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應接類書 |
영어음역 | Eungjeopryuseo |
영어의미역 | Record of Recep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현명철 |
[정의]
1872년 부산 왜관에서의 교섭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책.
[저자]
대화의 중심은 관수 후카미 로쿠로[深見六郞]가 차사 사가라 마사키[相良正樹]를 내세우고 통사[통역] 히로세와 우라세[浦瀨最助]를 동석시킨 형태로 진행되었다. 요시오카 고우키[吉岡弘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쓰시마 출신의 외무성 관리들을 전면에 내세워 회담을 진행시켰다. 당시 최고위직은 요시오카 고우키였으므로 그의 책임 하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편찬/간행 경위]
『응접류서(應接類書)』는 회담의 보고를 위해 작성한 것이고, 이는 『대일본 외교 문서(對日本外交文書)』 제5권 151문서[1872년 6월 24일]인 요시오카 고우키, 모리야마 시게루, 히로쓰 히로노부 3인이 외무성으로 보낸 복명서에 “미력을 다하였음은 별책 「응접류서(應接類書)」, 「왕복 서류(往復書類)」, 기타 일기(日記) 등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1935년 부산부 회계과에서 인계받았다는 도장이 있다.
[형태/서지]
『응접류서』는 외무성 용지에 필사되었다. 훗날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서체는 붓으로 쓴 흘림체[고문 서체]이다. 처음에는 8행의 외무성 용지에 기록하였는데 5월 6일자부터는 10행의 외무성 용지에 기록하였다.
[구성/내용]
내용은 별차(別差) 고강여(高剛汝)가 가훈도(假訓導)로서 폐번치현(廢藩置縣)[1871년에 일본은 영주가 다스리던 번을 없애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현을 설치함]과 대마도주가 외무 대승이 되었음을 알리는 서계(書契)[공문]를 접수하는 3월 20일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즉 전반부에는 차사의 서한을 수리하라는 관수(館守)의 요구 및 서한의 내용과 형식을 검토하고 일본의 변화를 탐색하는 별차의 대화서가 중심이 되며 총 32매 분량이다.
핵심이 되는 3월 20일의 대화서는 총 41매로 차사의 진술문과 청일 수호 조규(淸日修好條規)가 제시되어 조선이 서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서한에 대한 회답과 동래 부사의 면접을 요구하는 관수, 훈도 안준경(安俊卿)이 동래부로 돌아온 후에 회답이 가능하므로 시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가훈도의 대화서가 중심이 되는 총 33매의 분량이다.
날짜별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1월 18일 관수[후카미 로쿠로]와 별차의 대화서[12매], 1월 20일 관수와 별차의 대화서[5매], 2월 11일 관수와 별차의 면담[2매], 2월 17일 관수와 별차의 대화서[5매], 2월 18일 관수와 별차의 대화서[4매], 3월 2일 관수가 차비관(差備官)을 통해 동래 부산 양(兩) 사또에게 보내는 전갈문(傳喝文) 제출[4매], 3월 20일 서한 접수가 이루어지고 차사 사가라 마사키의 진술문 및 청일 조약문[41매], 4월 1일 대화서, 가훈도가 관수에게 보낸 각서[3매], 5월 2일 관수와 가훈도의 대화서[4매], 5월 6일 가훈도와 관수의 대화서, 차사 사가라 마사키의 진술문[12매], 5월 11일 별차와 차사, 관수의 대화서[9매], 5월 12일 교섭 경위[5매] 등이다.
[의의와 평가]
일본, 특히 외무성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행간에 숨어 있는 조선의 입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기유약조 체제는 막부의 멸망과 폐번치현으로 인한 대마주의 소멸로 인해 붕괴된다. 당시는 왜관에서 외무성 관리와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마도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동래부는 이 회담 이전까지 일본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대마주를 통한 외교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월20일 이 서계를 받아들임으로 외무성과의 직접 대화의 가능성은 커지고 대마도의 입장은 불안해지게 된다. 아울러 차사 일행이 동래 부사 면접을 요구하며 난출(攔出)[처벌과 불이익을 각오하고 일본인 거류지를 무단으로 벗어나 동래부에 들어가 면접을 요구하는 일종의 시위 행위]을 단행하였을 때, 왜관에 있었던 대마도 관리와 상인들이 조선의 태도가 정당하다고 하고, 꼭 면접할 필요는 없다고 소통사(小通詞) 최재수(崔在守)에게 진술하였기 때문에 난출이 실패하고 면접이 불발로 끝난 사실을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