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응접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91
한자 應接書
영어음역 Eungjeopseo
영어의미역 Book of Recep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현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저자 히로세 나오유키
간행자 일본 총영사관
권책 1책
저술 시기/일시 1872년 9~11월연표보기 - 저술
편찬 시기/일시 1872년 11월연표보기 - 편찬
발견|발굴 시기/일시 1835년 12월 21일 - 부산부 회계과에서 인계
소장처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월드컵대로 462지도보기

[정의]

1872년 일본이 동래 왜관을 접수하고 조선과 교섭하게 된 경위를 적은 외교 문서.

[개설]

외무성 고위 관리로 대마도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과의 직접 교섭을 위해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 일행이 군함 춘일(春日)·유공(有功) 2척을 몰고, 난출 이후 대마도에 돌아와 있었던 히로세 나오유키[廣瀨直行],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 1819~1883],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1842~1919]와 함께 1872년 9월 15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그는 기존 1대관인 카이즈 모타로[海津茂太郞]과 우에노 케이스케[上野敬助], 나카야마 키베에[中山喜兵衛]를 외무성 지침에 따르지 않고 조선의 의도를 따랐다고 문책 귀국시켰다. 또한 후카미 로쿠로[深見六郞]를 관수로, 히로세 나오유키를 1대관으로, 스미나가 도모스케[住永友輔]를 2대관 겸 대통사로, 츠카다 키사부로[束田喜三郞]와 스미나가 케이조[住永啓三]를 통사 겸 서기로, 오쿠 요시노리[奧義制]를 학사 겸 감찰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9월 23일 외교 교섭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군함을 이끌고 쓰시마로 이동하였다가 11월 6일 귀경하여 활동 내용을 복명하였다. 『응접서(應接書)』는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명령에 따라 이때부터 11월 17일까지 피차의 교섭 경위를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교섭 일기문 중심의 문서이다[총 109매].

[저자]

주로 1대관인 히로세 나오유키가 회담에 임하였으며 통사인 츠카다 키사부로, 스미나가 도모스케가 동석하였으므로, 대부분 히로세 나오유키가 작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편찬/간행 경위]

『응접서』는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복명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으므로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복명 보고를 위해 작성을 명령한 것으로 판단되며, 『대일본 외교 문서(對日本外交文書)』 제6권 사항5 101문서[1873년 1월 3일] 모리야마 시게루의 보고서 중 “이번에 건너온 『응접서』 2책을 공람으로 올립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이미 1873년 1월에 외무성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1935년에 부산부 회계과에서 인계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서지]

『응접서』『응접류서(應接類書)』와는 달리 외무성 관인이 없는 용지에 필사되었다. 8행 용지와 10행 용지가 번갈아 사용되고 있다. 당시 왜관에서 두 가지 용지를 혼용하였거나, 대마도에서 모리야마 시게루가 수정 필사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구성/내용]

『응접서』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왜관의 1대관이 별차에게 보낸 구진서[2매]가 있는데, 송 씨가 대마주 태수에서 해임되었으므로 기존의 세견 무역(歲遣貿易)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체된 물품 전액을 송치하고자 한다. 이를 조사하고 또 교린을 위해 취관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임소에서 보낸 기사년[1869년]부터 신미년[1871년]까지의 진상품 미수기(未收記)[3매]에는 생동(生銅) …… 5만 4,561근, 숙동 …… 9,000근, 단목, 호초, 백반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표류민 인수인계 관련[6매] 내용으로는 전라도 제주 표류민 1명에 대한 문정기, 전라도 해남 표류민 9명의 문정기, 전라도 제주 금년 표민 3명의 문정기, 인수증[별차 현대유가 1대관에게 보낸 인수증, 1872년 9월 18일] 등이 있다. 회답을 요청한 일[9매]로는 9월 29일, 10월 2일, 10월 9일 3일간의 일기가 있다. 훈도가 환부하는 즉시 통고하도록 요청한 일[89매]로는 배소 통사 최재수(崔在守)와 통사 츠카다 키사부로, 스미나가 도모스케의 응접기가 있다. 그 밖에 10월 15, 16, 19, 23, 24, 26, 28, 29일과 11월 1, 7, 14, 17일의 기록이 있다.

[의의와 평가]

기유약조가 붕괴되고 난 후, 동래부와 외무관원의 첫 대화이므로 중요한 사료이다. 다만, 외무성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행간에 숨어 있는 조선의 입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즉 당시 조선으로서는 외교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일본의 의도에 말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탐색을 계속하면서 정중하고 신뢰를 잃지 않는 외교 태도를 견지해야 하였다. 이를 조선의 악습이라고 조급하게 판단하는 기술은 조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배려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