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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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宅奎 |
영어음역 | Gu Taekgyu |
이칭/별칭 | 구명규(具命奎),성오(性五),존재(存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초명은 구명규(具命奎),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대사성을 지낸 구성(具宬)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종주(具宗柱)이고, 아버지는 구혁(具爀)이며, 어머니는 이만저(李曼著)의 딸이다. 아들은 형조 판서를 지낸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이다.
[활동 사항]
구택규(具宅奎)[1693~1754]는 1714년(숙종 40) 증광시 병과 급제 후 1731년(영조 7) 진주 목사를 비롯하여 경상도 도사, 금성 현감, 영월 부사, 동래 부사, 회양 부사, 관동 심리사(關東審理使) 등을 지냈다. 1735년(영조 11)에는 동지사 겸 사은사행(冬至兼謝恩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승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 공조 참판, 형조 참판, 병조 참판, 한성부 판윤,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그중 경상도 도사는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자벽(自辟)[조선 시대 때 일부 특수직에 한해 관아에서 독자적으로 임용하던 제도]으로 뽑혔다.
구택규는 1736년(영조 12) 6월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부임하지 못했다가 이듬해 12월 재임명되어 1738년 1월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대차왜(大差倭)[조선 후기 일본에서 보내온 사신]의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은 일과 대차왜 시봉(侍奉) 인원수를 잘못 적었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파직되었다. 재임 기간이 짧았으나 왜관과 그 주변을 통제하기 위해 변문 절목(邊門節目)을 설치하는 등 공이 컸다.
구택규는 동래부를 대일본 교류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을 방어하는 국경 지대로 여겼다. 이 때문에 동래 부사가 되기 전부터 부사의 군 지휘권 강화를 주장하였고, 부임 후에는 동래 부사가 독진 겸 수성장(獨鎭兼守城將)을 맡아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1739년(영조 15) 승인을 받았다.
[학문과 저술]
『속대전(續大典)』[1744]의 편집당상(纂輯堂上)·교정당상(校正堂上)을 지냈고, 영조의 명으로 법의학 서적인 『무원록(無寃錄)』의 내용을 고치고 더해 1748년(영조 24) 아들 구윤명이 『증수 무원록(增修無冤錄)』을 편찬케 하였다. 법률서인 『백헌총요(百憲摠要)』[1740년 무렵]의 초안을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상훈과 추모]
1741년(영조 17) 강원도 영월에 구택규 선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