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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43
한자 東槎日錄
영어음역 Dongsaillok
영어의미역 1682 Travelogue of Japan
이칭/별칭 『김역사동사일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저자 김지남
권책 1책
행자 10행 28자
규격 27.8×19.2㎝
어미 상이엽화문어미
권수제 김역사동사일록
판심제 김역사동사일록
저술 시기/일시 1683년연표보기 - 저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5년 - 『국역 해행총재Ⅵ권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정의]

1683년 부산에서 출발한 통신 사행을 수행한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저술한 일본 사행록.

[개설]

조선 시대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일본 체험은 외교 사절인 통신사(通信使)를 통해 이루어졌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목숨을 건 사행이었던 만큼 사행원들에게 있어 그 체험은 소중할 수밖에 없었고, 견문과 감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일기와 시문, 그리고 견문록으로 대표되는 사행록(使行錄)의 저술로 이어졌다. 김지남『동사일록(東槎日錄)』도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대표적인 책이다.

『동사일록』은 1682년(숙종 7) 통신 사행에 한학 역관(漢學譯官)으로 수행한 김지남이 사행에서의 견문과 감상을 일기로 기록한 것이다.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린 뒤 길을 떠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임금께 복명(復命)하는 전체 사행 일정을 충실히 담고 있다. 또 사행과는 별도로 제주에 표류한 중국인들의 조사 기록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당시 표류민의 처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외교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통신사 사행록이 대체로 사대부에 의해 작성된 것과 달리 곡진한 인정(人情)의 표출, 현실 체험을 통한 대일(對日) 문화 우월 의식의 희석, 공명심에 젖은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을 통해 당대 위항인(委巷人)의 의식을 잘 대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저자]

김지남[1654~1718]의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 호는 광천(廣川). 숙종 때의 한학 역관이다. 별제(別提)를 지낸 김여의(金汝義)와 전의감 정(典醫監正) 이몽룡(李夢龍)의 딸 함평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72년(현종 11) 19세의 나이로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 윤지완(尹趾完)을 따라 통신사에 수행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사람됨이 너그럽고 부드러워 능히 남을 용납하며 자못 군자의 풍도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692년(숙종 18)에는 상서(尙書) 민취도(閔就道)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화약(火藥) 만드는 법을 배워 와 1698년에는 그 연구한 내용을 중심으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짓기도 했다. 특히 1712년 5월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이 나라의 국경을 정하러 후주(厚州)에 왔을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박권(朴權)을 보필하였다. 이때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목극등을 설득하여 백두산의 천지(天池)를 경계로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왔을 정도로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중국통(中國通)의 인물이다.

이후 최석정(崔錫鼎)[1646~1715]의 명령에 따라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고래(古來)의 사적 등을 서술한 12권 6책의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저술하기도 했다.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부인 설성 박씨와의 사이에 7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김경문·김현문(金顯門)·김순문(金舜門)·김유문(金裕門)·김찬문(金纘門) 등 5형제가 모두 역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번지 우봉 김씨 묘역에 묻혀 있다.

[편찬/간행 경위]

1763년(영조 39) 통신 사행에 정사로 참여한 조엄(趙曮)『해사일기(海槎日記)』 10월 6일자 기록에는 통신사 사행원들이 남긴 일기를 1748년(영조 24) 통신사 정사인 홍계희(洪啓禧)가 수집하여 『해행총재(海行摠載)』라고 이름을 붙였고,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이를 모두 61편으로 재정리하여 제목을 『식파록(息波錄)』이라 바꾼 후 조엄에게 보내 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조엄은 이 『식파록』에 자신의 『해사일기』를 첨가해 다시 『해행총재』라 이름을 붙였다.

김지남『동사일록』조엄이 엮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행총재』 23권에 『김역사동사일록(金譯士東槎日錄)』이란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한 『국역 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에는 『동사일록』이란 이름으로 남용익(南龍翼)의 『문견별록(聞見別錄)』, 홍우재(洪禹載)『동사록(東槎錄)』과 함께 Ⅵ권에 수록되어 있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행총재』 속에 수록된 『김역사 동사일록(金譯士東槎日錄)』은 필사본 1책으로 되어 있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크기는 27.8×19.2㎝, 반곽(半郭)의 크기는 21.5×15.7㎝이다. 행수는 10행, 1행의 자수는 28자이다. 주석은 쌍행(雙行)이다. 판심은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를 가지고 있다.

[구성/내용]

『동사일록』은 크게 「동사록(東槎錄)」과 「회사록(回槎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사록」은 1690년 한여성(韓汝聖)의 동사록서(東槎錄序), 이장영(李長榮)의 송별시 1수, 세 사신과 원액 총수 475명의 이름, 일본 관백에게 보내는 국서와 별폭, 관백의 아들인 약군(若君)에게 보내는 별폭, 집정(執政)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서계와 별폭 등을 기록한 ‘가지고 간 물건[賚去物件]’, 예단 물건을 준비하여 봉한 5월 5일의 기록에서부터 8월 21일 에도[江戶] 도착과 함께 중국어 통역 일본인과의 문답 내용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회사록」에는 일본 관백의 회답 서계와 별폭, 약군의 별폭, 집정과 풍후수(豊後守)·단후수(丹後守)·비후수(備後守)의 회답 서계와 별폭 등을 기록한 ‘가지고 온 물건’과, 9월 12일 강호를 출발하여 11월 16일 복명과 11월 19일 비망기까지를 기록한 일기, 사행의 일정과 거리를 기록한 일본 왕환 총목(日本往還總目), 1688년 9월 4일에 제주에 표류한 중국인들을 조사한 ‘무진구월초사일제주표한인처문정수본(戊辰九月初四日濟州漂漢人處問情手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산에 대해서는 동래에 도착한 5월 24일부터 부산을 떠나 대마도로 향하는 6월 18일까지와, 사명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한 10월 30일부터 서울을 향해 부산을 떠난 11월 3일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도일 전 5월 29일에는 경상 좌수사 이만휘(李萬徽)가 주최하는 전별연(餞別宴)이 베풀어졌다. 정사를 비롯하여 일행 모두가 꽃을 꽂고 기생의 가무가 깃들여졌는데, 김지남은 이를 “일찍이 보지 못하던 푸짐한 잔치”라고 적고 있다.

6월 2일에는 일행이 목욕재계하고 3일에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낸 뒤 각자의 배를 타고 바다 10여 리를 나갔다 돌아오는 선유(船遊)가 베풀어졌다. 6월 8일에는 왜관(倭館)에서 열리는 시장을 구경하고 6월 17일에는 일찍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화지산(華池山) 만세암(萬歲庵)에 있는 동래부 호장 정문도(鄭文道)의 무덤을 찾았다.

김지남은 “앞에는 큰 들이 펼쳐져 있고, 외청룡(外靑龍)·외백호(外白虎)는 큰 산이 내달아 있어 은연히 누워 있는 용과 쭈그리고 있는 범과 같다. 바다 속의 절영도(絶影島)는 그 바깥 안산(案山)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이 무덤의 기이한 모양이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부산에 도착한 이후의 기록은 거의 공식적인 기록만을 적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통신사 사행록이 대체로 사대부에 의해 작성된 것과 달리 김지남『동사일록』홍우재(洪禹載)『동사록(東槎錄)』과 함께, 위항인(委巷人)의 의식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서문, 사행 축하시, 동사록, 회사록, 일본 왕환 총목 등 상당히 정제되고 세련된 짜임새를 지녀 당대 위항 문인들의 문학 의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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