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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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龍翼 |
영어음역 | Nam Yongik |
이칭/별칭 | 운경(雲卿),호곡(壺谷),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태문 |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고조할아버지는 남맹하(南孟夏)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무주 현감(茂洲縣監) 남복시(南復始)이며, 할아버지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남진(南鎭), 아버지는 남득명(南得明)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신복일(申復一)의 딸이다. 부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채성구(蔡聖龜)의 딸이다. 큰아들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남정중(南正重)이고, 첩의 소생인 둘째 아들은 남성중(南聖重)이다. 남성중은 1711년(숙종 37) 통신사 서기로 일본에 파견되어, 대를 이어 통신사행을 다녀온 기록을 세웠다. 남성중은 사행길에서 57년 전 아버지가 지은 시문을 마주하고는, 그 감격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손자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남한기(南漢紀)이고, 증손자는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며, 고손자는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다.
[활동 사항]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용인 유곡(柳谷)[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용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용익(龍翼)’이라 이름 하였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1646년(인조 24)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세 때인 1648년(인조 26) 최연소로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예조 정랑(禮曹正郞),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 등을 지냈다.
28세 때인 1655년(효종 6)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뽑혀 일본을 방문하고 이듬해 돌아와 통신사행을 기록한 『부상록(扶桑錄)』을 썼다. 기록에 따르면 통신사 일행은 1655년(효종 6) 4월 20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20일 돌아왔다.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하여서는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을 올리라는 대마도주의 청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음식을 제공받지 못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은 고사가 유명하다. 남용익은 귀국 후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한 뒤에는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예조 참의, 도승지,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에는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進奏使)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숙종 6)부터 좌참찬(左參贊),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1687년(숙종 13)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이조 판서를 지내는 등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숙종이 소의 장씨(昭儀張氏)가 낳은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가 1691년(숙종 17) 함경도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2월 유배지에서 죽었다. 남용익은 생전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정두경(鄭斗卿), 정태제(鄭泰齊), 김익렴(金益廉), 이단상(李端相), 김수항(金壽恒)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용익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기록인 『부상록』을 비롯하여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壺谷集)』, 신라부터 조선 인조 대까지의 명사 497명의 시를 소개한 『기아(箕雅)』,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 시들을 추려서 싣고 평론을 곁들인 『호곡 시화(壺谷詩話)』 등을 남겼다. 3권 3책으로 된 시화집 『호곡 시화』의 편찬에서 알 수 있듯이, 남용익은 서거정(徐居正), 허균(許筠)에 이어 창작, 비평, 선시(選詩) 등 고전 시학 전 분야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비평가로 평가되고 있다.
[묘소]
남용익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산27-2번지 동학골 의령 남씨(宜寧南氏) 묘역 맨 위쪽에 있다. 묘역 입구에는 1864년(고종 1)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이재(李縡)가 짓고, 고손자 남공철이 글을 썼다.
[상훈과 추모]
1725년(영조 1) 7월 28일 문헌(文憲)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