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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27
한자 扶桑日記
영어음역 Busang Ilgi
영어의미역 1655 Travelogue of Japa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필사본]
저자 조형[필사자: 쇼센 데이조(小泉貞造)]
사용활자 필사본
권책 1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6×18㎝
저술 시기/일시 1655~1656년연표보기 - 저술
소장처 하버드 옌칭도서관 - 미국 보스톤

[정의]

1655~1656년 부산에서 일본으로 간 통신사 조형(趙珩)의 사행록.

[개설]

조형이 1655년(효종 6)에서 1656년에 걸쳐 일본으로 통신 사행을 다녀오며 기록한 일기이다. 통신사에 임명된 조형은 1655년 4월 20일 궁궐에서 하직하고 한강을 건너, 10월 3일 에도[江戶]에 도착해 8일 국서 전달 의식을 행하였다. 에도 체류 도중인 10월 14일 닛코[日光]로 출발해서 18일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초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사당인 도쇼구[東照宮]에서 효종의 어필(御筆)을 전달하고 21일 다시 에도로 들어왔다.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2월 1일 쓰시마[對馬]의 장수원(長壽院)에 머문 날까지의 일기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1655년 5월 9일 동래에 들어와 한 달 간 부산에서 머물다가 6월 9일에 출항하였다. 이 기간 동안 조형은 도쇼구에 걸 효종의 친필을 구하는 일본 쪽의 요청 때문에 한양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였고, 여러 예물을 구비하느라 상당히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부산이 조선 시대 대일 외교의 중심지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조형[1606~1679]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이다. 1630년(인조 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예문관 등을 거쳤다. 1632년 인조의 생부인 원종을 추존하자는 논의에 반대하여 부여로 귀양을 갔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독전 어사(督戰御史)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였다. 1651년(효종 2) 사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1655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60년, 1663년 각각 하지사,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벼슬은 병조 판서, 공조 판서,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원년) 70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79년 한양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편찬/간행 경위]

에도 바쿠후의 요청에 따라 1655년 조선에서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1641~1680]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형은 이때 정사로 파견되었는데, 『부상일기(扶桑日記)』는 그 사이의 일기를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1711년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趙泰億)[1675~1728]은 참고하기 위해, 조형의 증손인 조경명(趙景命)[1674~1726]에게 『부상일기』를 빌려 휴대하였다. 이때 조태억은 일본에 남은 조형의 유묵을 수습하여 뒤쪽에 덧붙였다. 구한말 진본을 손에 넣은 이마니시 기마타[今西龜滿太]가 뒤에 일본어 설명을 덧붙여 넣었다. 다시 1917년 고이즈미 데이조[小泉貞造]가 용산에서 진본을 필사한 본이 현전한다.

[형태/서지]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26×18㎝이다. 행자 수는 10행 20자이다. 본문 86장, 부록 31장이다. 현전하는 『부상일기』는 2종이다. 1종은 진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마니시 기마타의 후손을 통해 임동권에게 전해졌고 현재 그의 아들인 임장혁이 소장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개되지는 않았다. 또 다른 1종은 고이즈미 데이조가 필사한 본으로, 현재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 본은 내용과 형태가 거의 일치한다. 단 하버드 옌칭 본에는 고이즈미의 필사기가 첨부되어 있다.

[구성/내용]

『부상일기』는 조선인의 기록과 일본인의 부기로 나눌 수 있다. 1655년 4월 20일 한양을 출발해 닛코까지 갔다가 돌아와 1656년 2월 1일 쓰시마에서 머물 때까지 2년여에 걸친 조형의 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뒤에는 사행 도중 지은 시 7수가 실려 있고, 조태억의 서문과 시 1수가 함께 실려 있다. 조태억의 기록을 통해 사행 출발 전 조경명에게 『부상일기』의 진본을 빌려 휴대하였고, 사행 도중 조형의 시를 수습하여 조태억이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부기는 이마니시 기마타가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통신사와 만났던 일본의 유명한 문사들 및 조태억·남용익(南龍翼) 등의 생애, 그리고 이들을 접대했던 일본의 하야시[林] 집안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고, 통신사에 관한 간략한 서술이 실려 있다. 이마니시가 『부상일기』의 진본을 손에 넣은 후 이해를 돕기 위해 1913년 직접 부기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에는 고이즈미 데이조가 일본어로 조태억의 서문을 번역한 것과 필사한 내력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1655년 남용익『부상록(扶桑錄)』과 달리 양적으로는 적으나, 정사의 입장에서 간략하면서도 꼼꼼하게 정무의 과정을 기록하여 역사적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 아울러 일본인의 부기를 통해 통신사 기록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 어떻게 입수되고 이해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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