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28
한자 趙珩
영어음역 Jo Hyeong
이칭/별칭 군헌(君獻),취병(翠屛),충정(忠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엄경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
대표관직 예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식년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독전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6년 - 사간원 헌납에 임명,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47년 - 사헌부 집의에 임명,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옴
호라동 시기/일시 1655년연표보기 -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옴, 『부상 일기』 저술
활동 시기/일시 1663년 -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74년 - 양주에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79년연표보기 - 사망
거주|이주지 한성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동래부 관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유배|이배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묘소|단소 조형 묘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 시호는 충정(忠貞). 할아버지는 감찰 조기(趙磯)이고, 아버지는 승지 조희보(趙希輔)이다.

[활동 사항]

조형(趙珩)[1606~1679]은 1626년(인조 4)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취소되어 다시 시험을 치러 1630년(인조 8)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를 거쳐 사국(史局)으로 옮겼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지제교(知製敎), 부교리(副敎理),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쳤다.

조형이 사간원 헌납일 때인 1646년(인조 24), 10년 전 치른 중시 별과(重試別科)가 취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참시관(參試官)이었던 조형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파직당했으나 곧 복직하여 1647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1년(효종 2)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온 뒤 보덕(輔德)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다. 1655년(효종 6) 대사간(大司諫)으로서 통신사 정사(正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부산에 머물며 경험했던 일들을 『부상 일기(扶桑日記)』로 남겼다. 이후 도승지(都承旨), 대사간, 동지 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예조 참판, 경기 감사, 형조 판서, 공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예조 판서 등을 거쳤다.

1663년(현종 4)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이듬해 돌아와 판윤(判尹)에 임명되었으나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가 남벌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임관이 취소되었다. 1665년(현종 6)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복직한 뒤 요직을 두로 거쳤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대공설(大功說)[9개월 동안 상복을 입음]을 주장하였다가 양주(楊洲)로 유배되었다. 1675년(숙종 1)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과 저술]

1655년(효종 6)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부상 일기』를 썼고, 편저로 『사학 규제(四學規制)』가 있다. 『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조형의 묘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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