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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차왜 등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11
한자 別差倭謄錄
영어의미역 Record of Byeolchawa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성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편자 예조 전객사
권책 10책
규격 41.3×27㎝
편찬 시기/일시 1637~1753년연표보기 - 편찬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

[정의]

조선 후기 일본에서 부산 왜관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에 관한 기록을 모아 놓은 책.

[개설]

『별차왜 등록(別差倭謄錄)』은 차왜 중 외교 의례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거나 별도의 명목으로 등록에 수록되지 않은 차왜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다. 차왜의 수행 업무가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의 죽음이나 관백 집안의 애경사와 대마도주의 즉위와 퇴위 및 애경사, 표류인의 송환 등을 정례화하는 경우 별도의 등록으로 편찬되었다. 『별차왜 등록』은 별도의 등록이 편찬되지 않은 외교 업무를 수행한 차왜들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별차왜는 조선 정부로부터 각종 연향 접대, 체재 비용, 회사 별폭, 연향 증급 예단 등을 지급받았고, 개시(開市)에도 참여하여 많은 경제적 이윤을 획득하였다. 별차왜는 정관, 도선주, 압물, 시봉, 반종, 격왜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정관과 봉진 압물이 각 1명이고, 반종은 처음에 3~5명 내외이었으나 후에 평균 10명으로 늘어났다.

[편찬/간행 경위]

『별차왜 등록』은 1637부터 1753년까지 경상 감영에서 올라온 장계와 그에 대한 조정의 결정 내용 등을 예조의 전객사에서 요약 정리한 문헌이다. 등록(謄錄)은 관청에서 주고받은 공문서를 베껴 수록[謄寫收錄]해 놓은 것을 말한다.

[형태/서지]

필사본으로 크기는 41.3×27㎝이다. 총 17책이었으나 6책과 11~16책이 없어져 총 10책이 전해지고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해제에는 1637~1856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연대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구성/내용]

『별차왜 등록』은 차왜가 조선에 도착하면서부터 되돌아갈 때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차왜가 지참하고 온 외교 문서[書契]와 선물[別幅] 등이 모두 쓰여 있으며, 이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접대 및 회답 서계와 선물 등이 함께 담겨져 있다. 또한 차왜가 수행한 외교 업무의 처리 내역이 상세하게 요약 정리되어 있다.

『별차왜 등록』 10책에 실린 연대는 1책 1637~1646년, 2책 1649~1668년, 3책 1657~1659년, 4책 1659~1670년, 5책 1691~1693년, 7책 1699~1709년, 8책 1710~1722년, 9책 1724~1732년, 10책 1731~1753년, 17책 1733~1736년 등으로 900여 건의 항목이 담겨 있다.

먼저 외교 업무의 처리 내역을 보면, 『별차왜 등록』은 조선 후기 한일 관계의 주요 외교 업무와 외교 의례 절차 등이 재정립되어 가는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유황을 수입한 적이 있다. 차왜 평성춘(平成春), 등지승(藤智繩) 등이 왔을 때 접대를 맡았던 역관 홍희남은 1636년 통신사행 당시에 대마도에 부탁해 놓았던 유황 2,000근을 인계하였으며, 그 대금 지급을 등지승에게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일어난 기독교도들의 반란인 시마바라[島原]의 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정부가 일본의 신불(神佛) 신앙을 비방하고 인륜을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1612년 기독교 금교령을 내린 뒤, 금압이 심해지자 1627년 시마바라의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를 말한다.

이 난이 조선에 처음 알려진 것은 1638년 3월이었으며, 이후 이와 관련한 차왜가 8차례 파견되었다. 시마바라의 난에 대해서 조선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자국의 내란을 알려준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방비를 허술하게 하려는 계책이라고 파악하였다.

한편 빈번한 차왜의 접대 절차 등이 마련되었다. 차왜의 접대는 조선에서 접대를 담당한 접위관과 차왜의 정관 등의 위치, 읍례(揖禮)의 순서 및 방법에서부터 사용되는 음식의 종류와 술잔을 주고받는 횟수까지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차왜에 대한 접대는 현직 홍문관의 관원이나 경상도 내 수령이 주관하였으며,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참여하였다.

특히 숙배례(肅拜禮)는 일본의 사신이 지참하고 온 외교 문서를 조선의 국왕에 바치는 의례로 초량 객사에서 이루어졌다. 숙배례는 건물의 아래 뜰에서 이루어졌는데, 이에 1637년 차왜 평성연(平成連) 등이 건물 위에 올라가 예를 올릴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외교의 격이 맞지 않으므로 뜰에 흙을 쌓아 판자를 깔고 행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 숙배례 외에도 입국을 축하하는 하선연(下船宴), 숙배례와 가지고 온 선물을 바치는 봉진연(封進宴), 체류하는 중간에 열리는 중연(中宴), 대마도로 출발하기 전에 열리는 상선연(上船宴) 등이 있다. 연향은 모두 연향 대청에서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별차왜 등록』은 외교 의례가 아닌 두 나라 사이의 외교 현안을 담당했던 차왜들에 관한 자료로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후기 한일 관계가 어떻게 정착되어 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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