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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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論賞賜米謄錄 |
영어의미역 | Record of Nonsangsam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성덕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왜관에서 활동한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에 대한 포상, 물품 수입 등 현안 처리에 관한 기록.
[개설]
17세기 조선과 일본은 국교 재개 이후 외교적인 현안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만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외교 사절 및 그들의 접대 규정, 체류지인 왜관의 설치와 운영 등에 대한 세세한 외교 협의가 필요했다. 특히 정기 외교 사절이었던 세견선 20척에 대한 접대 비용의 절감은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중요 현안 중의 하나였다. 20척이 모두 도항하지 않고 제1특송선과 제4선송사가 나머지 특송선과 세견선을 겸대하도록 하는 겸대제의 시행으로 조선 정부는 접대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아울러 유황·염초 등의 물품 수입, 도항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은 사절에 대한 접대 문제 역시 17세기의 주요 현안이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논상사미 등록(論賞賜米謄錄)』이다.
[편찬/간행 경위]
『논상사미 등록』은 예조 전객사에서 편찬하였는데, 차왜의 포상, 쌀의 지급, 물품 수입,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은 사례 등에 대한 세세한 외교 협의를 위해 정리한 것이다.
[형태/서지]
필사본 1책으로 크기는 41.5×26.8㎝이며, 상단에 내용을 요약하여 기록해 놓았다.
[구성/내용]
『논상사미 등록』은 「논상(論賞)」, 「아국구청(我國求請)」, 「무노인(無路引)」, 「잡초(雜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1627년 4월부터 1674년 7월 사이의 기록이다. 주로 경상 감사와 동래 부사의 장계, 예조와 비변사의 회답 등이 정리되어 있다. 「논상」은 1637~1640년에 접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시행한 겸대제 협의에 공을 세운 차왜 등지승(藤智繩) 등에 대한 포상 기록이다.
등지승이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얻는 것과 공무역의 허용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관직은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쌀 20석을 특별히 내려 주었으며, 목면 13동 20필의 무역을 허용하였다. 등지승의 뒤를 이어 온 귤성정(橘成正) 역시 쌀 받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아국구청」은 1637~1645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추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염초·유황·궁각(弓角)·도검(刀劍) 등의 군수품과 진피(陳皮)·감초(甘草) 등의 약재, 농우(農牛), 목화 등이었다. 「무노인」은 1640~1662년에 도항 증명서인 노인(路引)을 지참하지 않은 차왜에 관한 기록이다.
「잡초」는 1638~1674년에 귀국한 왜선의 노 젓는 격왜수를 잘못 보고한 역관과 동래 부사, 부산 첨사를 처벌한 일, 왜인들이 왜관에 머무르는 기일을 정하는 일, 표류한 왜인의 배가 파손된 것에 대한 처리,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의 다례와 관수 진상연의 개정 요구에 대해 잘못 대응한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역관 등의 처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한일 간의 주요 현안 문제 해결의 공을 세운 차왜에 대한 포상과 일본으로부터 물품을 수입하는 일, 도항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은 차왜의 처리, 기타 외교 업무를 잘못 처리한 동래 부사 등의 처벌 등 실질적인 외교 업무의 처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