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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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蓬山浴行錄 |
영어음역 | Bongsangyokhaengnok |
영어의미역 | Record of a Hot Spring in Dongn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동표 |
[정의]
1617년 한강 정구(鄭逑)가 신병 치료를 위해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 과정을 제자인 이윤우(李潤雨)가 기록한 책.
[개설]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은 정구[1543~1620]가 신병 치료를 위해 제자들과 함께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봉산욕행은 1617년 7월 20부터부터 동년 9월 4일까지 45일간 이루어졌다. 당시 정구의 나이는 75세로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었다.
[편찬/간행 경위]
『봉산욕행록』은 정구의 제자 이윤우가 정구의 동래 온천욕을 동행하면서 적은 일기를 1912년 정재기(鄭在夔)가 목판본 1책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다.
[형태/서지]
1책의 목판본이며, 크기는 20.3×29.2㎝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의 책명은 『한강 선생 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이다.
[구성/내용]
45일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수록된 인물은 정구를 비롯한 한강 문인[수행 문인 및 내방 문인], 경상 감사 및 연로의 지방관, 영접차 내방한 사림, 동래 읍민 등 약 300명이고, 이 가운데 한강 문인으로서 실명이 확인되는 인물은 약 80명이다. 동래 온정(溫井)행의 명분과 목적은 온천욕에 있었지만 그곳에 가는 경로는 선유(船遊)를 겸한 여행이었다. 45일간의 여정은 나름대로의 규율에 의하여 움직였다. 직일(直日) 수행자를 정하여 전체 일정을 소화하여 나갔다. 정구의 동래행은 사림에 대한 영남 사림의 맹주 의식을 천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뒤를 이을 고제(高弟) 집단을 설정해 나가는 자연스런 기회로 작용하였다.
정구 일행은 7월 20일 출발하여 칠곡·하빈·현풍·고령 지역을 지나고, 7월 22일부터 23일까지 창녕·영산·함안·칠원 지역, 7월 24일부터 25일까지 밀양·김해·양산 지역을 거쳐 7월 26일 정오 무렵 동래 온정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정구는 8월 26일 동래를 떠나기까지 꼬박 한 달을 이곳에서 머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구와 그 일행은 동래 부사 황여일(黃汝一)을 비롯한 인근의 지방관 및 선비들의 극진한 예우를 받게 된다. 정구의 온천욕행을 미리 알고 있었던 황여일은 온정을 새로이 정비하고 가옥을 건립하는 등 일행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봉산욕행록』 7월 26일자 기록에 “오시(午時)에 온정의 욕소(浴所)에 도착하였다. 동래 부사는 지난봄에 이미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2실(室) 1청(廳)의 초옥(草屋)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매우 정결했다. 지금 선생을 따라오는 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는 다시 임시 가옥 2칸을 지어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삼았으니, 그 정성을 족히 알 수 있었다.”라 하였다. 그러면서 동래 온정에 대해서는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전국의 온천 중 동래 온천이 가장 좋다고 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봉산욕행록』을 보면 온천 욕법에 대해 알 수 있는데, 목욕을 하는 사람은 맨 바깥쪽에서 시욕을 하고 그 다음에 나무로 만든 목탕에서 목욕을 한 뒤 바깥 석탕에 들렀다가 안의 석탕으로 든다고 되어 있다. 온천에 대하여 묘사한 장면을 보면, “온정에는 내외에 석감(石龕)[돌로 만든 욕조]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왕이 만든 것이라 한다. 하나의 욕조에는 5~6명씩 들어갈 수 있고, 샘은 위쪽의 석공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물이 매우 뜨거워 손과 발을 함부로 담글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목욕탕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고, 수온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 달 남짓한 온정 생활은 안온하면서도 분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구는 거의 매일 목욕을 하였으며, 더러는 침을 맞기도 하였다. 목욕 횟수는 모두 41회였다. 그러는 동안 동래의 읍인(邑人)들과 내방객들의 문안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7월 29일에는 연로 군현에 응접을 지시하였던 경상 감사의 관문이 도착하였고, 동래부사 황여일은 끊임없이 사람과 물자를 보내 일행을 보살폈고, 동래 부민들의 환대도 계속 이어졌다.
8월 6일에는 동래 향교에서 성대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정구와 그 제자들을 접대하였으며, 8월 23일에는 경상 좌수사가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도 있었는데, 시장 보러 나갔던 시종인들과 시장 감독자와의 싸움이 있기도 하였다. ‘오복 연혁도’, ‘퇴계 선생 예의 문답’ 등에 대한 강론을 하면서 학술 활동에도 열정을 보였다.
정구는 동래를 출발하기 이틀 전인 8월 24일에는 몰운대를 유람하기 위하여 부산으로 떠났다가 8월 25일 온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8월 25일 세 차례의 목욕을 끝으로 동래 온정에서의 일정을 사실상 마무리하였다. 이튿날 정구는 작별의 아쉬움 때문인지 아침부터 과음을 하였고, 동래를 떠나 10리쯤에서 취기로 인해 잠시 쉬어가기도 하였다.
일행은 통도사를 거쳐 9월 4일 경산의 소유정(小有亭)에 이르러 경상 감사 윤훤(尹喧)의 영접을 받아 수작을 마치고 저녁 무렵 사수(泗水)로 돌아감으로써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1617년 이루어진 정구의 봉산욕행은 동래부사 황여일의 주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정구가 동래 온정에 체류하는 동안 부사 황여일을 비롯한 동래 부민들의 영접은 당대를 대표하던 지식인에 대한 예우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의의와 평가]
『봉산욕행록』을 통하여 정구 만년 한강 학파의 분포, 고제 그룹의 동향, 한강 학파 내부의 결속과 유대 등을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17세기 초반 당대 최고의 학자를 예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동래 온정의 모습과 온천욕의 방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