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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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行錄 |
영어음역 | Ilbon-haengnok |
영어의미역 | 1420 Travelogue of Japan |
이칭/별칭 | 『노송당 일본행록』,『노송 선생 일본행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태문 |
[정의]
조선 전기 회례사 정사로 부산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다녀온 송희경(宋希璟)의 사행록.
[개설]
조선 시대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일본 체험은 통신사(通信使)와 같은 외교 사절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일(對日) 사행은 바다를 건너는 힘든 노정이었던 만큼 그 체험은 실로 소중할 수밖에 없었고, 견문과 감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일기와 시문, 그리고 견문록으로 대표되는 ‘사행록(使行錄)’의 저술로 이어졌다. 송희경의 『일본행록(日本行錄)』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 대표적인 사행록이라 할 수 있다.
『일본행록』은 1420년(세종 2) 회례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송희경이 사행에서의 견문과 감상을 시로 기록한 것으로,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린 뒤 길을 떠나 사명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임금께 복명하는 전체 사행 일정을 충실히 담고 있어 사행의 전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 사행과는 별도로 제주에 표류해 온 중국인들에 대한 조사 기록도 함께 수록함으로써 당시 표류민의 처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외교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저자]
송희경(1376~1446)의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자는 정부(正夫), 호는 노송(老松)·노송당(老松堂)·균리(筠里)이다. 1376년 공홍도(公洪道) 연산현(連山縣) 죽안방(竹安坊) 균정리(筠亭里)에서 사재감 사(司宰監事) 송현덕(宋玄德)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2년 28세의 나이로 별과에 급제한 후 29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32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34세에 사간원 헌납(獻納)과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 등을 거쳐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역임하였으며, 36세 때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20년인 45세 때에는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로 승진된 후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승정원 정(承政院正)에 이르렀다. 천성이 온아(溫雅)하고 재예(才藝)와 문학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이안눌(李安訥)·송순(宋純) 등과 함께 담양(潭陽)의 구산 서원(龜山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일본행록』의 저술은 송희경이 일본 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세종에게 복명한 1420년 10월 25일, 세종이 “타국으로부터 돌아왔으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하교한 데서 비롯된다. 이에 송희경이 일본 사행 중 ‘귀와 눈으로 접한 모든 것을 다 기록한’ 것이 바로 자필본 『일본행록』이다. 이 자필본은 송희경 사후 분실되었다가, 1556년(명종 11) 그의 4세손인 송순이 다시 찾아 소세양(蘇世讓)의 서문과 자신의 발문을 덧붙여 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군에게 약탈되고 만다.
다행히 임진왜란 포로로 일본에 잡혀 있던 정경득(鄭慶得)이 일본에 남아 있던 『일본행록』을 필사해 온 것을 송희경의 6세손인 송징(宋徵)이 정경득의 집에서 발견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이 1799년(정조 23) 10월 편찬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4월에 출간하게 된다.
현재 일본에는 코마키본[小牧本]·하기노본[萩野本]·동대본(東大本)·경대본(京大本)·회여록수재본(會餘錄收載本)·역사지리수재본(歷史地理收載本) 등 6종의 필사본이 전한다. 코마키본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따라 조선에 와 약탈해 간 것을 코마키 마사나리[小牧昌業]가 소장한 것으로, 송희경의 자필본을 송순이 얻어 책으로 만든 원본으로 여겨진다.
하기노본은 규슈대학[九州大學] 부속 도서관 하기노 문고[萩野文庫] 중의 필사본으로 코마키본을 필사한 것이고, 동대본은 도쿄 대학[東京大學] 사료 편찬소에 소장된 것으로 코마키본을 초록해서 필사한 것이다. 또 경대본은 교토대학[京都大學] 사학 연구실 소장으로 동대본의 사본이고, 회여록수재본은 일본의 아세아협회가 편집한 『회여록(會餘錄)』 6집에 수록된 것으로 코마키본 중에서 시를 제외하고 활자화한 인쇄본이다. 역사지리수재본은 잡지 『역사지리(歷史地理)』에 동대본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형태/서지]
『일본행록』은 1책의 목활자본으로, 책의 크기는 31.6×20.6㎝이다. 사주단변(四周單邊)에 반곽(半郭)이 23.3×15.5㎝이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행수는 10행, 1행의 자수는 21자이다. 판심(版心)은 상하내향화문어미(上下內向花紋魚尾)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노송 선생 일본행록(老松先生日本行錄)』[육당 B10 A9]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조엄(趙曮)이 엮은 『해행총재(海行摠載)』나 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1977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한 『국역 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에 와서야 황신(黃愼)의 『일본왕환 일기(日本往還日記)』, 정희득(鄭希得)의 『해상록(海上錄)』 등과 함께 8권에 수록되었다.
[구성/내용]
『일본행록』은 크게 권두(卷頭), 본문, 권말(卷末)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권두에는 소세양의 「노송당선생일본행록서(老松堂先生日本行錄序)」와 조평(趙平)의 「일본행록서(日本行錄序)」 등 서문과, 1619년에 6대손 송지(宋篪)가 『일본행록』이 전래된 과정을 소상히 적은 「노송당일본행록가장(老松堂日本行錄家藏)」 등이 실려 있다.
본문은 ‘일본 행록’의 왕명을 받고 서울을 출발한 1420년 윤정월 15일부터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10월 26일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227편의 시와 『일본행록』을 엮게 된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행록』에 수록된 시는 쉽고 평이한 말로, 아담하면서도 평범하지 않고 격하면서도 성내지 않는 담담하고 자연스런 문체로 써 내려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권말에는 후손인 송순의 「노송당 일본행록발(老松堂日本行錄跋)」[1558]과 조홍립(曺弘立)·송환기(宋煥箕)·김이계(金履銈) 등이 각각 1626, 1795, 1799년에 쓴 「노송선생 일본행록발(老松先生日本行錄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행의 부산 체류 기간은 조선 후기 통신 사행과 비교할 때 상당히 짧았다. 2월 5일 김해의 동교루(東郊樓)에 올랐다는 기록과 함께, 2월 13일 관찰사 이발(李潑)이 부산포에서 일본의 사승(使僧)과 조선의 회례사를 전송하는 잔치를 열었고, 2월 15일 사행이 부산포를 출발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산과 관련된 내용은 동래관에 머물러 관찰사의 선적(船積)에 관한 관자(關子)[관청에서 발급하던 허가서]를 기다릴 때에 지은 「차동래동헌운(次東萊東軒韻)」, 「차양산서명부진운(次梁山徐明府晉韻)」 등 11수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부산에서의 정취는 「온정손한성가흥출소아가무(溫井孫漢城可興出小娥歌舞)」에서 잘 드러난다. “아리따운 붉은 뺨 이목이 수려하여/ 너울너울 춤추는 양 봉황새가 나는 듯/ 술동이 앞에서 양관삼첩(陽關三疊)을 차마 들을 수 있으랴/ 장사라도 철석 간장 녹아내릴 것이니.”라고 하여 기생 아이의 노래 소리에 이별이 다가옴을 아쉬워하고 있다.
또한 「차동래동헌운(次東萊東軒韻)」에서는 “봄날에 왕명 받들고 해 뜨는 곳으로 향하니/ 장건 뗏목 위에 바다는 하늘에 맞닿았네/ 오늘날 이역 간다 말하지 말라/ 화악산 앞 상스러운 구름 둘러 있다네.”라고 하여 바다를 건너는 사행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행록』은 현존하는 문헌이 조선 후기 사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조선 건국 초기의 사행 기록으로, 산문이 아닌 시가 중심이 된 사행록의 전범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일본의 지명을 조선 한자음으로 표기하려는 시도를 보였는데 이는 이후 사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사행에서 체험하고 견문한 일본의 사회와 풍속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