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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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慧日 |
영어음역 | Hyeil |
이칭/별칭 | 하동규(河東奎),하봉규(河鳳奎),동산(東山),하동산(河東山)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정의]
부산 범어사를 중심으로 선풍 진작과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한 승려.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하동규(河東奎), 또는 하봉규(河鳳奎), 법명은 혜일(慧日), 법호는 동산(東山). 하동산(河東山)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하성창(河聖昌)이고, 어머니는 정경운(鄭敬雲)이다.
[활동 사항]
혜일[1890~1965]은 1890년 2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서당에서 7년간 한학을 배우고, 19세에 단양읍 익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에는 경성 중동중학교, 1912년 가을에는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백용성(白龍城)을 은사로 하고 오성월(吳惺月)을 계사로 하여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출가하였다. 1913년 봄에 범어사 강원에서 『능엄경(楞嚴經)』을 배우고, 1914년 평안남도 맹산으로 가서 방한암(方漢巖)에게 『능엄경』·『기신론(起信論)』·『금강경(金剛經)』·『원각경(圓覺經)』을 배웠다. 1916년에 범어사로 돌아와 대교 과정을 2년간 수학하였다. 1919년부터 2년간은 3·1 운동으로 수감된 백용성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1921년 봄 이후 오대산 상원사, 건봉사 등 각처의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다. 1927년 7월 5일에는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바람에 부딪치는 대나무 잎 소리에 도를 깨쳤다. 이후 혜일은 범어사, 범어사 내원암, 범어사 금어선원, 해인사, 도리사, 은해사 등의 조실을 지냈다. 한편 1935년 3월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개최된 전국 수좌 대회의 실무를 맡기도 하였다. 1936년 혜일은 일제의 탄압으로 대각교 운동을 접고 재산을 정리하여 범어사로 온 백용성의 부름을 받아 그의 계맥을 전수받고, 1940년 백용성이 대각사에서 입적하자 범어사 금어선원에 조실로 주석하였다.
1941년 2월 26일부터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 법회(遺敎法會)에서 혜일은 불교 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는 일제 불교 정책, 일본 불교의 침투로 인한 승풍(僧風)의 쇠약을 차단하고 청정 법맥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43년 혜일은 범어사 계단의 전계(傳戒) 대화상이 되어, 조선의 자생적인 계맥과 중국에서 유입된 계맥을 겸수하였다. 혜일은 일제 강점기를 이어 교계의 원로로서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1956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사상과 저술]
혜일의 마음 사상은 두 개의 큰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선불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음’을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연루가 번뇌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깨침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는 것을 직시하고 ‘마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식교학을 근거로 한 것이다. 삼계(三界)의 현상 그대로가 오직 심(心)이요, 만법의 현상 그대로가 오직 식(識)이기 때문에 이를 ‘불법의 종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전체가 마음이요, 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혜일의 사유 체계에서 계행(戒行)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컸다. 혜일에 의하면 해(解)와 행(行)은 둘이 아니며 곧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般若)에 방해가 없다 하여 해와 행을 나누고 걸림 없는 행 등을 주장하는 것은 망령된 짓에 불과하다. 따라서 계(戒)가 없는 정(定)이 없고 정(定)이 없는 혜(慧)가 없음을 알고 여실히 공부를 해 나가면 저절로 계·정·혜 3학이 이루어진다.
혜일은 지계(持戒)가 선행되지 않으면 자성(自性)을 회복하여 깨침의 경지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동시에 지계(持戒)가 선행되면 바로 자성(自性)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서 계행(戒行)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성을 회복하여 깨치는 것이라는 것을 복합적으로 설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자성을 회복하는 날이 바로 계(戒)를 받는 날이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戒)를 받는 그 날이 바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 날이 되고, 잃어버렸던 자성(自性)을 회복하는 날이 된다.
한국 간화선의 전통은 사교입선(邪敎入禪)을 중시하는 선교 일원적 전통이다. 혜일 역시 사교입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활구참선(活句參禪)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혜일의 내면에는 교학(敎學)에 깊은 이해가 깃들여져 있기 때문에 선교일원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자 그대로의 사교입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교입선(邪敎入禪)에 보다 경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교입선적인 경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敎)에 더 경도되어 있는 보조(普照)의 선법에 대한 혜일의 존경심은 그의 문집 곳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간화선 이론에 있어서도 상당 부분을 혜일이 보조에 의탁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간화선은 먼저 의단(疑團), 즉 핵심이 되는 문구에 대한 의심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때 의심의 대상인 문구는 무자설두(無字話頭) 한 구절이다. 한 구절인 화두를 통해서 알음알이를 단칼에 잘라내고 곧바로 꺾어 깨달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보조의 경우 간화선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의심에 대해서 언급을 별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혜일은 다르다. 혜일은 의심을 통해서 구경각(究竟覺)에 이를 수가 있다고 보았다. 혜일에 의하면 화두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집중된 의심 덩어리[疑團]를 의미한다. 의단은 방법론적인 의심으로서 우리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자리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밀고 나가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따라서 혜일의 간화선에서 화두는 의심과 더불어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하나의 양식이 된다.
보조는 깨침이 공부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자기 마음이 곧 참된 부처임을 바로 믿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조가 말하는 바의 깨침은 본각적(本覺的) 돈오(頓悟)라기 보다는 시각적(始覺的) 돈오(頓悟)인 해오(解悟)이다. 그러나 혜일에 의하면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보조의 돈오점수와는 크게 다른 입장이며, 오히려 중국 조사선의 돈오[돈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혜일의 간화선법은 대부분 보조의 영향 아래에 있다. ‘의단과 화두의 상관관계’에 대한 부분과 ‘돈오’에 대한 언급은 보조의 영향을 벗어난 혜일의 독자적 선법이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 내에 부도탑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6년부터 매년 음력 3월 23일에 범어사 설법전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