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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정화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28
한자 佛敎淨化運動
영어의미역 Movement of Buddhism Purification
분야 역사/근현대,종교/불교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인물/단체 백용성|동산|이승만|이청담|범어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해방 직후연표보기 -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62년 4월연표보기 - 통합 종단의 등장으로 일단락
발단 시기/일시 1954년 5월 20일 -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발단

[정의]

일제의 한국 침략으로 나타난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제거하기 위한 정화 운동.

[개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일제 식민지 불교의 청산 운동은 전개되었다. 특히 1954년에 가시화되어 1962년까지 전개된 정화 운동은 정화 불사라고도 한다. 불교 정화 운동은 오늘날 조계종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구승에 의한 종대 재건 및 주도, 대처승의 배제,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민족 불교의 재건, 불교 근대화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불교 정화 운동은 용성 문도 즉 백용성(白龍城), 동산(東山)을 비롯하여 범어사 선원의 수좌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

불교 정화 운동은 일제가 물러간 직후 해방 공간에서 교단, 재야의 불교 혁신 단체들이 불교를 바르게 잡으려는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불교 정화라 하지 않고, 교단 개혁, 불교 혁신, 불교 개혁, 신불교 지향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범어사가 설립했던 선학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상징성과 전체성 측면에서 본다면 선학원 전체가 참여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 위치한 선학원 승려들이 중심이 되었다.

1950년 농지 개혁으로 인한 불교계, 사찰 경제의 위축은 선방의 폐쇄, 수좌의 생존문제 등이 노정되었다. 이에 대한 교단 집행부의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53년 가을, 선학원에서 다수의 수좌들이 모임을 갖고 이에 대한 문제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1954년 5월 20일 이른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대처승은 물러가라’라는 요지의 ‘유시’를 기점으로 불교 정화 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과]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이후 1955년 8월 13일 전국 승려 대회를 기점으로 종권, 사찰의 주도권은 비구승에게로 넘어왔다. 당시 비구 측은 기존 집행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종헌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대처 측은 이에 불만을 품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1959년 1월 5일 비구와 대처 측에 분쟁 종결을 위한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소송으로 불교 정화 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어 1962년 4월의 이른바 통합 종단의 등장으로 일단락되었는데, 비구와 대처 양측이 불교재건위원회의 합의, 불교재건비상종회의 구성을 통한 종헌의 제정, 공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6개월 후에 대처 측에서 이탈을 선언하여 통합 종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교 정화는 명분과 이상으로 내세운 ‘정화’가 되지 못하고 분규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 태고종의 등장으로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공식적으로 마감되었고 이후로 사법부의 쟁사(爭事)가 거의 사라졌다. 당시 이청담(李靑潭)은 정화 운동을 3단계로 정리하였다. 1단계는 사찰 정화, 2단계는 승려 정화, 3단계는 신도 정화라 하였다. 1단계는 공권력의 도움을 얻어 외형적인 정화는 기하였으나, 2단계·3단계의 정화는 매우 미진하였고 그 후유증이 불교 분규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로서 불교 정화 운동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불교 정화 운동은 이승만이 정권을 재장악하기 위한 차원에서 불교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불교계 내부 즉 한국 불교관점에서 본다면 대처승은 근본 불교와 한국 불교 전통에서는 이단이고, 수행하는 수좌승들이 교단의 중심부에서 배척받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불교계의 부패, 승려의 타락성, 사찰의 혼탁함, 불교 문화재의 파괴, 불교의 세속화 등이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백용성의 건백서 제출, 이청담 주도의 조선 불교 학인 대회, 유교 법회 등을 통해 모순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여기에 수행하는 수좌들의 최소한의 수행 공간이 박탈되었고, 사찰 및 불교계 공간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궁핍이 정화 운동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불교 정화 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선학원, 백용성의 건백서 제출, 불교학인 대회, 유교 법회 등을 통해 범어사의 역사와 가풍이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과]

불교 정화 운동은 숱한 모순과 문제점을 갖고 진행되어,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실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고, 태고종의 등장, 기타 여러 종단의 난립, 불교계의 폭력성, 승려 자질 문제, 불교 교육 제도의 정비 등도 정화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불교 정화 운동의 주도 핵심 세력은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선학원백용성-동산으로 이어지는 범어사의 민족 불교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유시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범어사에서는 자생적인 불교 정화 움직임이 노정된 것에서 확인된다.

불교 정화 운동은 한국 불교의 전통 의식 환기, 승단 및 승려의 청정 의식 환기, 민족 불교의 지향 재검토, 교단 정체성의 각성, 불교 문화재의 정비, 사찰 환경 개선 등 긍정적 효과를 거두었다. 이에 대해 불교계 자주성의 훼손, 사찰 점유를 둘러싼 권력의 개입, 승려의 부족 및 승려 교육에 대한 문제점, 정화 운동의 여파로 선(禪)을 우선하는 수행 풍토 고착화 등 부정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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