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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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香椎源太郞 |
영어음역 | Kashii Gentaro |
이칭/별칭 | 향추원태랑,조선의 수산왕,부산의 3대 거부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석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유력 자본가.
[개설]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는 러일 전쟁 당시 부산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본 축적에 성공한 일본인 자본가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郎]와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함께 부산의 3대 거부[거두]로 불렸다. 수산업계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조선의 수산왕으로도 불렸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발판은 1906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비호 아래 조선 왕실 의친왕(義親王) 소유의 진해만 어장의 소유권을 차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카시이 겐타로는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사이토 마코토[斎藤実]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업을 확장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일본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사업 범위는 최초의 자본 축적 발판이던 어장 경영을 중심으로 수산업[수산물 가공, 유통 판매], 에너지 산업[전기], 제조업[도자기]으로 확장되었다. 여기에 힘입어 1920년대에는 부산의 지역 자본가에서 탈피하여 전국을 대표하는 일본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가계]
카시이 겐타로의 집안은 후쿠오카[福岡]의 지역 명문가로 메이지[明治] 이후에는 군인 가문으로도 알려졌다. 사촌동생뻘인 카시이 코헤이[香椎浩平]는 1936년 군부 내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이른바 ‘2·26 사건’ 당시 육군 중장으로 도쿄계엄사령관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카시이 코헤이의 형 카시이 슈이치[香椎秀一]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육군 중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역대 조선 총독들이 군인 출신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카시이 겐타로가 조선 총독의 직접적 비호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활동 사항]
카시이 겐타로는 1867년 일본 후쿠오카 현[福岡縣]에서 태어나 22세에 후쿠오카 지역 명문가인 카시이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카시이는 1905년 조선에 건너와 부산을 거점으로 경제 활동을 하였다. 그가 처음 손을 댄 사업은 거제도에서 군용 통조림을 제조하는 것이었으나 큰 재미를 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자본가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는 당시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조선 왕가 의친왕 이강(李堈) 소유의 거제도 어장을 임대받아 경영하면서부터였다. 이를 바탕으로 1907년 부산 어시장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수산물 유통 회사인 부산수산주식회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고, 1915년에는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사장, 1920년에는 부산상업회의소 회장이 되어 부산 상공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 1919년에 「조선 통치 사견(朝鮮統治私見)」이라는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올리고, 1922년 조선수산협회 회장, 1923년 조선총독부가 수산업 진흥의 명목으로 주최한 조선수산공진회(朝鮮水産共進會) 후원 회장을 담당하는 등 1920년대에 이미 지역 자본가를 넘어서 조선을 대표하는 일본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1920년대 중반 카시이 겐타로는 제조업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1925년 일본 가나자와[金澤]에 본점을 두었던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의 사장이 되면서였다. 부산 지역의 자본가가 가나자와 소재 기업의 사장이 되었던 배경에는 일본 경질 도기의 분공장이 지점 형태로 부산 영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시이 겐타로는 동 회사의 본점을 당시까지 지점이 있던 부산 영도로 옮기고 시설을 확장하여 조선에서 가장 큰 도자기 제조 회사로 키워 냈다.
19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가 1933년 공포한 전기사업령(電氣事業令)을 토대로 전기사업 통합을 추진하자 여기에 편승하여 전력업계에서도 유력 자본가로 부상하였다. 1934년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 회장, 1937년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회장이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조선전기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전기업계를 대변하였다.
이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카시이 겐타로는 부산상업회의소 회장, 부산부협의회 의원, 부산박물관 건립 추진, 일제 패망 후 일본인 철수를 돕기 위해 설립한 부산 세와카이[世話會] 회장 등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유지로서의 역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산의 일본인 사회는 이러한 카시이 겐타로의 사회·경제적 활동을 높게 평가하여 생전인 1935년 10월 부산항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산역 맞은편 구(舊) 영국영사관 터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전제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카시이 겐타로는 반세기 동안 닦아 온 부산의 경제적 기반을 뒤로한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인 후쿠오카로 돌아간 카시이는 가나자와의 일본경질도기공장을 거점으로 재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1946년 3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