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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과 효자 그리고 열녀들. 충효열(忠孝烈)이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녀자가 지조를 지켜 남편을 따라 순절하는 행실을 통칭한 말이다. 충효열을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삼강(三綱)이라고 하였으며, 유교 이념의 기본 덕목이다. 즉 삼강이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군위신강(君爲臣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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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구득룡(具得龍)이고, 동생은 구두성(具斗星)이다. 구주성(具周星)의 집안은 오랫동안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살았다고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 효자 효녀 조에 따르면 “효자 구주성은 아버지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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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부산 동래 출신의 효자. 김득인(金得仁)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족보에 그의 아들 김진구(金振雊)가 1612년(광해군 4)생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70(선조 3)~1580(선조 13)년 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집이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대기 어려웠으나 자신은 굶으면서도 어머니는 식사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정성껏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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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경(重卿), 호는 임정(林亭). 김해 김씨 청유공파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김석익(金聲益), 아들은 김봉의(金鳳儀), 손자는 김상제(金商濟)이다. 부인은 진주 강씨(晋州姜氏)[1685~1716]이다. 김련(金鍊)은 1688년(숙종 14)에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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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국보(國輔), 호는 백원당(百源堂). 아버지는 김련(金鍊)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姜氏)이다. 아들은 김상제(金商濟)이다. 이들은 모두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의 효자와 효부로 이름났다. 김봉의(金鳳儀)는 1714년(숙종 40)에 태어났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청유공파 김청유(金淸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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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삼묵재(三默齋). 청유파인 김청유(金淸有)의 13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련(金鍊)이며, 아버지는 김봉의(金鳳儀)이다. 김상제(金商濟)는 1740년(영조 16)에 태어났다. 아버지인 김봉의가 병이 들어 겨울인데도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강가에서 울면서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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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김석숭(金碩崇)은 김해 가락면 죽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출신으로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죽어 시묘(侍墓)를 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예법에 따라 수빈(水濱)[시중을 들며 모심]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자 변을 맛보아 병세를 알아보고,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뿌려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무덤가에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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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도원(道原), 호는 동농(東儂). 할아버지는 효행으로 알려진 김영우(金英禹)이다. 김응권(金應權)은 1874년(고종 11)에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인 유도(柳島)에서 태어난 인물로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의표가 당당하고 언행이 아중(雅重)하며 재능이 있어 시서 백가(詩書百家)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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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출신의 효자. 자는 위원(渭源).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이 8대조이며, 유곡(裕谷) 김보문(金寶文)이 7대조, 송미(松楣) 김일개(金一介)는 고조부이다. 김학(金澩)은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조용하여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부모와 어른을 섬기는 데는 지극하였다. 1723년(경종 3)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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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치열(致烈).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11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김복만(金福滿)이고, 할아버지는 김유관(金宥寬)이며, 아버지는 김흥식(金興植)이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부인은 남원 양씨(南原梁氏)로 양익하(梁益夏)의 딸이다. 아들은 김성무(金性舞)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선희(文善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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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열녀. 본관은 밀양(密陽). 남편은 윤규석(尹奎石)[1880~1933]으로, 김해사립녹명학교[현 녹명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지냈다. 박소임(朴小任)은 김해 녹산 사암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출신으로, 슬기롭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정한, 부덕을 갖춘 여인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윤규석과 혼인하여서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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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부산 기장 출신의 열녀. 본관은 밀양(密陽). 다른 이름은 박겹이, 박섭이다. 아버지는 박성신(朴聖臣)이고, 남편은 구종하(具鍾河)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청국 공신(淸國功臣) 능성군(陵城君) 구수영(具壽永)[1456~1524]의 후손이다. 능성 구씨(陵城具氏)는 대대로 기장 죽성리에 살았다. 박협이(朴梜伊)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여 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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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서홍인(徐弘仁)의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이름은 서홍(徐弘) 또는 서홍업(徐弘業)이다. 서홍인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장현 서상면에 있는 집에서 24㎞[60리]나 떨어진 동래부까지 매일 걸어 다녔다.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동래부에 합쳐졌기 때문에 부산성(釜山城)에서 군역을 하였던 것이다.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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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어경덕(魚敬德)[1629~1701]은 김해군 녹산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태생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663년(현종 4) 아버지가 통신사를 수행하여 쓰시마[對馬]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죽자 날마다 바다를 향해 통곡하니 3년 만에 아버지의 시신이 떠내려와 비로소 장례를 치렀다. 그 뒤로 어경덕은 배를 타지 않고, 바다와 말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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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기장 출신의 효자. 옥팔오(玉八五)는 조선 영조 대 기장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나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소년 장사였다. 13살 때인 무더운 여름날 방문을 열어 놓고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자다가 비명 소리에 놀라 깨어나 큰 호랑이가 아버지를 해치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옥팔오는 잽싸게 호랑이의 목을 감싸고 아버지 옆에 있던 목침을 들어 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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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조상이 거제(巨濟)에서 살다가 김해 태야면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부인은 김씨(金氏)이고, 아들은 김해의 거유(巨儒) 성리학자 이명후(李明厚)이다. 이시회(李時檜)[1831~1915]는 김해 태야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출신의 효자이다.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여 모든 생활을 이시회에게 의지하자, 아침에 나가서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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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부에 살았던 열녀 시어머니와 며느리. 동래부에 전씨(田氏) 성을 가진 시어머니와 함씨(咸氏) 성을 가진 며느리가 모두 열녀가 된 집이 있었다. 전 소사(田召史)[소사는 성 아래에 붙여 ‘과부’를 점잖게 일컫는 말]는 동래부의 하급 관리이던 최의준(崔義俊)의 어머니로, 자신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죽음으로써 열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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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일보(一甫), 초명은 상업(尙業).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장수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천익휘이다. 천성태(千聖泰)[1725~1781]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드렸고, 가난하지만 부모의 상에 맛난 음식이 끊이지 않게 하였으며 철 따라 몸에 맞는 의복을 마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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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양(潁陽). 석대리[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영양 천씨(潁陽千氏)가 대대로 모여 살아 석대 천씨(石坮千氏)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의 공신(功臣) 화산군(花山君) 사암(思庵) 천만리(千萬里)[명나라 원군의 장수로 와서 귀화함]의 9세손이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천상(千祥)의 8세손이다. 아들 천치형(千致亨), 손자 천원진(千遠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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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동래 출신의 효자. 황택룡(黃澤龍)은 오랫동안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던 중 어머니가 기절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살렸다. 1610년(광해군 2) 황택룡의 효행이 관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효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