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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70
한자 千乘昊
영어음역 Cheon Seungho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효열로 158[금곡동 100-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명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영양
출생 시기/일시 1817년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2년 - 천승호 부부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및 숙인 추증. 효열각 건립
출생지 양산군 대하면 덕두리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묘소|단소 천승호 묘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관련 유적 금곡청소년수련원 -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100-1 금곡청소년수련원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영양(潁陽). 석대리[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영양 천씨(潁陽千氏)가 대대로 모여 살아 석대 천씨(石坮千氏)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의 공신(功臣) 화산군(花山君) 사암(思庵) 천만리(千萬里)[명나라 원군의 장수로 와서 귀화함]의 9세손이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천상(千祥)의 8세손이다. 아들 천치형(千致亨), 손자 천원진(千遠鎭), 증손자 천무룡(千武龍), 고손자 천익주(千益柱)까지 내려올 동안 김해군 녹산면에도 연고가 있었다.

[활동 사항]

천승호(千乘昊)[1817~1867]는 경상남도 양산군 대하면 덕두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에 살았다. 7세 때 아버지가 죽자 시신을 안고 슬프게 부르짖어 피눈물이 솟았고, 3년간 소식을 하니 이웃과 마을 노인들까지 효동(孝童)이라고 칭찬하였다. 천승호는 어머니도 극진히 섬겼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고기를 잡아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저녁에는 잠자리를 봐 주고, 새벽마다 문안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경인년 겨울 어머니가 풍질(風疾)에 걸려 여러 달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자 한겨울에 산속에서 능구렁이 여러 마리를 구해 와 약으로 썼더니 병이 즉시 나았다.

어머니가 학질을 앓을 때는 좋은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송아지를 내다 팔았다. 천승호가 소 판 돈 10꿰미를 가지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산속에서 도적을 만났다. 산적이 칼을 휘두르며 돈을 뺏으려 하자 천승호는 병든 어머니를 봉양할 돈이라고 울면서 애원하였다. 이에 산적들은 “흉년으로 우리도 살기 어렵지만 어찌 효자의 돈을 빼앗아 모친 봉양을 못하게 하리까?”라고 말하며 백배사죄하고 가 버렸다. 이렇듯 천승호의 효성은 동물을 감동시켜 눈 속에서 능구렁이가 저절로 나오게 하고, 사람을 감동시켜 산적을 교화시켰다. 천승호는 23세에 혼인하였는데, 아내 경주 이씨(慶州李氏) 또한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모셨고, 후에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였다.

[묘소]

천승호의 묘는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아내의 묘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867년(고종 4) 양산군의 유림이 천승호와 아내 이씨의 행적을 상소하여, 1872년(고종 9) 예조에서 천승호에게는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通勳大夫司憲府監察)을, 아내 경주 이씨에게는 숙인(淑人)을 증직(贈職)하였다. 또한 인근에 널리 알리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부부의 효열행을 책으로 만들고 효열각(孝烈閣)을 세우도록 하였다. 천승호와 경주 이씨 정려비는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금곡 청소년 수련원 정원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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