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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45
한자 李時檜
영어음역 Yi Sihoe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유영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
성별
본관 경주
출생 시기/일시 1831년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15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김해 태야면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거주|이주지 김해 태야면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조상이 거제(巨濟)에서 살다가 김해 태야면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부인은 김씨(金氏)이고, 아들은 김해의 거유(巨儒) 성리학자 이명후(李明厚)이다.

[활동사항]

이시회(李時檜)[1831~1915]는 김해 태야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출신의 효자이다.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여 모든 생활을 이시회에게 의지하자, 아침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돌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챙기고, 계절에 맞추어 봉양하니 이시회의 아버지는 맹인 생활 40년 동안 추위와 더위를 몰랐고, 직접 사물을 보는 것 같아서 전혀 답답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약을 구해 밤중에 돌아오다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이시회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호랑이가 호위해 주었다. 이시회의 부인 김씨 또한 효우(孝友)하는 집안의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시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집안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이시회 부부의 행실을 본받아 장유존비(長幼尊卑)의 질서가 확실했다고 한다.

당시 고을의 수령이 탐욕하여 공무(公務)로 백성들을 협박하여 뇌물을 챙겼다. 어느 날 이시회에게도 조운선(漕運船)을 인도하여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이시회는 분연히 “나는 불의를 저지를 수 없다”면서 뇌물을 주지 않고 버티다가 옥에 갇혔다. 이에 이시회가 밤에 집에 가서 아버지를 보살피고 새벽에 감옥으로 돌아오겠다고 간곡하게 청하니, 수령이 감동하여 허락하였다. 그 후 이시회는 12㎞[30리]나 떨어진 집과 감옥을 9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면서 끝내 뇌물을 주지 않고 버티니 수령이 결국 풀어 주었다. 아버지가 81세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자, 먼저 죽은 어머니와 같은 장소에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다른 사람이 이미 무덤을 써서 묏자리를 온전히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시회가 무덤 근처의 땅을 매입하려 애쓰는 것을 보고 원근의 사람들이 다투어 도와주어 원하는 곳에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상훈과 추모]

이시회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3년간 애통해하면서 시묘를 살았다. 이에 수령이 쌀과 고기 등을 보내 치전(致奠)을 도왔고, 관찰사도 위문을 왔다. 김해의 유림은 이시회에 대한 효행 정려를 청하는 글을 올려, 감복한 암행어사의 비답을 받았다고 한다. 이시회와 부인 김씨의 효행은 『김해읍지(金海邑誌)』에 수록되었고, 조선 후기 성주(星州) 지역의 거유(巨儒)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이효자전(李孝子傳)」을 지어 이시회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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